미용고축사
샤워기 물줄기가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다. 따뜻한 김이 욕실을 채우는 동안, 나는 눈을 감는다. 물소리가 세상을 가린다. 이 짧은 순간만큼은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작은 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 나온다. 따뜻한 물이 있어서, 이 물을 쓸 수 있어서. 아침마다 같은 말을 중얼거린다. 거창한 기도는 아니다. 그저 하루를 여는 인사다.
물이 등을 타고 내려간다. 어깨에 쌓인 긴장이 함께 흘러간다. 이때 나는 천천히 얼굴들을 떠올린다. 어제 만난 사람, 오래전 스친 사람,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사람.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를 아프게 했을지 모른다.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한 시선이 있었을지 모른다. 물줄기를 따라 그 순간들이 흘러간다.
"고맙습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다섯 문장이 전부다. 길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샤워하는 동안이면 충분하다. 이 시간이 내게는 하루를 씻어내는 의식이다.
이 습관은 2025년부터 시작됐다. 어느 날 문득, 살면서 쌓인 먼지가 보였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는 것들. 미처 하지 못한 사과, 전하지 못한 고마움, 표현하지 못한 마음.
처음엔 어색했다. 혼자 욕실에서 중얼거리는 모습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걱정도 됐다. 그래도 계속했다. 말로 꺼내니 마음이 달라졌다.
'미안하다'라고 말하면, 그날 하루는 조금 더 조심스러워진다.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된다. '고맙다'라고 말하면, 사소한 일에도 눈이 간다. 누군가 건넨 친절이 보인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나 혼자 하는 말인데, 행동이 따라온다.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때와는 다르다. 소리 내어 말하면, 그 말이 몸을 움직인다.
서울에 사는 딸 집에 머문 적이 있다. 낯선 욕실이었지만 습관은 그대로였다. 샤워하며 평소처럼 중얼거렸다.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딸이 묻는다.
"엄마, 혼잣말을 왜 그렇게 해?"
"이상한 곳에 빠진 거 아니야? 사이비 같은 거?"
딸의 표정이 진지하다. 걱정하는 눈빛이 역력하다.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욕실에서 혼자 뭔가를 외우는 엄마라니.
나는 웃으며 설명했다. 종교가 아니라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니라고. 그저 하루를 정리하는 방식이라고. 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지막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그래도 남들 있을 땐 하지 마. 좀 이상해."
밖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 수 있다. 굳이 소리 내어 말해야 하나. 마음으로 하면 되지 않나. 바쁜 아침에 그런 여유가 어디 있나.
나 역시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번거롭고, 쓸데없어 보였다. 누군가 보면 웃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해보니 알았다. 마음으로만 하는 건 다르다는 걸.
생각은 금방 사라진다. '미안하다'라고 속으로 생각해도, 다음 순간 잊는다. '고맙다'라고 마음먹어도, 행동은 변하지 않는다. 머릿속에만 있으면 그냥 생각일 뿐이다.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이 다르다. 귀가 듣는다. 목소리가 몸을 깨운다. 말이 되면, 그제야 현실이 된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라고 말하면, 그날은 정말 조심하게 된다. 말을 고르게 된다. 표정을 살피게 된다. 단어 하나가 행동을 바꾼다.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면, 세상이 달리 보인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소중해진다. 물, 햇빛, 사람들의 친절. 감사가 눈을 뜨게 한다.
'축복합니다'라고 말하면, 미움이 줄어든다. 누군가를 원망하던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상처를 준 사람도, 나를 힘들게 한 사람도, 그 사람 나름의 삶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 마음이 닫히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문을 열어둘 수 있다. 오늘도 살아갈 힘이 생긴다.
다섯 문장이 하루를 바꾼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다.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변화다.
며칠 뒤였다. 서울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딸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미용고축사"
다섯 글자만 적혀 있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고맙습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그 첫 글자를 따서 만든 말이다.
창밖을 보며 웃음이 났다. 이상하다고 하더니, 결국 따라 하고 있구나.
말은 이렇게 번진다. 강요하지 않아도, 설명이 길지 않아도. 삶 속에서 천천히 스며든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샤워기를 켰다. 따뜻한 물이 머리를 적신다. 김이 오르는 욕실에서 나는 다시 중얼거린다.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고맙습니다. 축복합니다. 사랑합니다. 미용고축사"
누가 듣든, 듣지 않든. 누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이 말들은 나를 씻어낸다.
샤워는 매일 끝난다. 하지만 씻어낸 마음은 하루를 넘어간다. 내일도 나는 같은 자리에서 같은 말을 할 것이다.
물소리에 묻혀서, 조용히. 그러나 빠뜨리지 않고.
언젠가 부름을 받는 날,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기를. 샤워하며 떠올린 그 얼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갈 수 있기를.
그때까지 나는 계속 씻을 것이다. 몸만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