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떤 부모인가

[필사 462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47

by 서강

어느 날 문득, 나란히 앉아 밥을 먹는 아이들을 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내 몸을 빌려 세상에 나온 존재들인데, 어쩜 이리도 다른지. 한 아이는 폭풍처럼 급하게 숟가락을 놀리고, 다른 아이는 느릿느릿 창밖의 구름을 구경하며 식사를 한다. 같은 부모, 같은 집, 같은 반찬인데도 그들의 내면은 각기 다른 결로 흐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조용히 부끄러워졌다.


얼마나 많은 순간, 나는 그 다름을 '고쳐야 할 것'으로 바라봤던가. 사랑한다는 이름으로, 더 잘되길 바란다는 말로, 사실은 내 방식을 아이에게 덮어씌우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흔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사랑이라는 핑계로 타인을 '나와 같은 규격'에 맞추려 든다. 하지만 인간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다. 같은 나무에서 열린 열매조차 햇살을 받은 양에 따라 당도가 다른 법이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인간이 사는 목적은 서로 다른 사람이 되는 것에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서로의 개성을 인정하며 사는 데 있다고.


이 문장 앞에서 나는 한참을 멈췄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부모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있다. "너를 위해서야." 그런데 그 말의 끝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거기엔 종종 '내가 원하는 너'가 숨어 있다. 진짜 사랑은 상대를 내 그림 안에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그림을 있는 그대로 걸어두는 일이다.


타인의 단점이 유독 내 눈에 거슬린다면, 그것은 사실 내 안에 숨겨진 '닮은 꼴'의 그림자를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느림이 답답하다면, 나는 어쩌면 그 느림을 허락하지 못하는 사람인 것이다. 결국 타인을 바라보는 눈은, 언제나 자신을 향한 거울이다.


사랑한다고 믿었던 부모는 아이의 다름을 '틀림'이라 읽는다. 현명한 부모는 그것을 '풍경'이라 읽는다.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부모는, 그 풍경 앞에서 말없이 오래 머문다.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 그것은 단순한 포기가 아니다. 인간을 향한 가장 고귀한 예의이자, 관계가 비로소 숨을 쉬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나는 오늘 나의 숙제를 '장점 먼저 바라보기'로 정했다.


당신의 뜰에는 오늘 어떤 다른 풍경들이 피어 있는가. 그 다름을 고치려 들지 않고, 그저 한 폭의 그림처럼 감상해 보는 것은 어떨까.


고치려는 손을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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