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나를 만나게 한다

[필사 472일]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57

by 서강

5년 다이어리를 쓴 지 4년째 , 나는 이상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행복했던 날의 기록은 지금도 그날의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꺼내 볼 수 있다. 그런데 12월만 되면, 그해 가장 아팠던 기억이 고스란히 살아 돌아온다. 2023년 12월, 홀린 듯 욕심에 이끌려 빠졌던 그 함정의 기억이 잉크처럼 번져 나를 다시 아프게 한다. 차라리 기록하지 말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기록은 죄가 없다. 기록은 그저 내가 그날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 있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후,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엔 너무 큰 상실이었다.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 삶만 변했다. 신앙의 힘으로 겨우 버텼지만, 어느 날 밤 결국 무너져 울며 불며 술을 마셨다. 다음 날 아침의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슬픔이 사라진 게 아니라, 슬픔 위에 고통이 하나 더 쌓여 있었다. 그날 이후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는다. 이건 의지가 아니었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술이 위로가 아니라 독이 된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운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이 세상의 모든 책이 그대에게 행복을 안겨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대 자신 속으로 들어가는 길을 조용히 알려준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조금 서운했다. 책이 행복을 주지 않는다니. 그럼 대체 왜 읽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사색을 하면서 조금씩 알게 됐다. 책이 행복을 주는 게 아니라, 책은 내가 나를 제대로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빌려주는 것이라는 걸.


5년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한 것도 독서를 통해 알게 됐다. 기록하면 삶이 달라진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실제로 달라졌다. 다만 내가 기대했던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 나는 행복한 기록만 남길 줄 알았다. 그런데 기록은 아픈 날도, 욕심에 눈이 멀었던 날도, 고스란히 붙잡아 두었다. 그게 기록의 힘이었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는 것. 내 안을 똑바로 보게 하는 것.


삶도, 글도, 술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런데 조절이란 게 사실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다. 조절은 나를 충분히 알고 난 뒤에야 가능한 일이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무너지는지, 어떤 순간에 욕심이 눈을 가리는지, 어떤 감정이 나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지. 그것을 먼저 알아야 조절이 시작된다.


책은 그 길을 알려준다. 다이어리도 그 길을 알려준다. 나의 고통스러운 경험도 결국엔 그 길을 알려준다. 행복을 주진 않더라도, 나를 만나게 해 준다. 그리고 나를 제대로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모든 기록과 독서는, 나에게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쓰고 있는 나의 글은, 읽는 이들에게 어떤 글이 될 수 있을까. 욕심을 내어본다면, 행복과 위로를 주는 글을 쓰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삶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걸, 글을 쓰면서 다시 한번 깨닫는다. 결국 좋은 글도, 나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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