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서서히 기울어가는 오후, 일정이 꽉 찼다. 6시 피부과 예약, 6시 30분 아파트 안내가 있다. 다행히 소장님이 안내를 맡아주기로 했다. 막내공주가 아들 결혼식을 앞두고 신경 써서 잡아준 피부과 예약이라 함께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울린 카톡 소리가 평온했던 오후를 뒤흔든다.
"엄마 어떡해 실외기실 문을 열어두고 온 것 같아."
평택 친구가 시댁인 경주에 들렀다가, 황남빵과 보리빵을 사 왔다. 냉장고 넣어두면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없어, 우리 집에서 가장 서늘한 실외기실에 둔 것이다. 반려견 신이와 똘이가 먹으면 안 되는 팥이 들어간 빵이다. 퇴근 시간대라 다시 돌아가면 피부과 예약은 물 건너간다. 막내공주의 빈틈없는 성격을 알기에 "닫았을 거야"라고 안심시켰지만, 염려증, 완벽주의 막내는 눈으로 봐야만 안심한다.
막내공주는 이미 핸들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미안하다는 한마디 없이, 양해를 구하는 것조차 잊은 채, 반려견 신이와 똘이의 안전이 걱정되는 마음을 엄마는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해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섭섭함과 분노가 교차한다. 꼼꼼히 확인하지 않은 실수로 모든 일정이 엉망이 되는 상황, 계획한 일이 일그러지면 가장 화가 난다.
집에 도착한 막내공주가 보낸 메시지, "엄마, 문 닫혀있어, 미안해. 예약은 다른 날짜로 정해야겠어, 언제나 편해" 허망함이 밀려왔다. 만약 지금 옆에 있었다면, 나도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떨어져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한 번 내뱉으면 주워 담을 수도 없고, 회복 불가능한데,
모든 관계에서 감정이 격해질 때는 잠시 거리를 두는 것이 최선이구나, 특히 부부관계에서는 더 필요한 것 같다. 신혼 때 다툼이 생기면 남편은 항상 자리를 피했다. 나는 그런 행동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지나고 보니 그게 현명한 선택이라는 것을 느낀다. 나보다 한수 위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감정은 호수처럼 잠잠해지니까,
작은 해프닝은 소중한 교훈을 남겼다. 불필요한 걱정과 불신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게 하는지, 관계에서 거리 두기가 때론 관계를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상의 작은 실수가 가르쳐준 소중한 지혜다.
때로는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것이 나와 상대방 모두를 지키는 방법임을, 오늘의 작은 소동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