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라는 존재의 시험대

by 서강


위기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위기 앞에서 본연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날, 나는 내 마음의 소용돌이를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섬기던 신께 항의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을 대면하기 싫었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냐고 울고 또 울면서 원망의 시간을 보냈다. 완전히 고립된 상태로 지냈다. 예기치 않은 사건 앞에 내 감정의 댐이 무너지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분노는 마치 통제할 수 없는 거센 물결 같다. 그 물결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표류해 왔다.


상처받은 영혼은 어둡다. 그 어둠은 마치 깊은 동굴 같아서 아무도 쉽게 들어갈 수 없다. 나는 오랫동안 그 동굴 깊숙이 숨어 있었고, 나를 이해하려는 이들조차 멀리했다. 그냥 사람이 싫었다.



김종원 작가의 글은 내게 충격적인 깨달음을 선사했다. 특히 두 가지 명확한 진실이 내 마음에 울렸다: 분노하면 내가 증오하는 사람과 점점 닮아가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내 소중한 하루를 스스로 피곤하게 만든다는 고통스러운 진실이다.


화가 났을 때 진정한 승자는 고함치는 자가 아니다. 욕설과 고함은 단지 내면의 취약함을 드러낼 뿐이다. 진정한 힘은 고요함과 이성적 언어에 있다. 분노를 참지 못하면 내 밑천이 바닥나고 만다.


나는 천천히 변화 중이다. 욱하는 성격 탓에 후회한 적도 많고 손해본일도 많다. 타고난 성격을 핑계 삼던 예전의 나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다.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매장을 운영할 때, 진상 손님을 대처하는 큰 공주의 행동에 놀란적이 있다. 손님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하지만, 큰 공주는 조곤조곤, 조용조용, 차분하게 흥분하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다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던진 한마디,

"어른도 어른다워야 어른대우를 받는 거예요. 사과하세요."


수선화처럼 야들야들 여린 줄만 알았던 큰 공주의 강단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세 살 먹은 손자한테도 배울 것이 있다고 하듯, 내 배속으로 낳았지만 나와는 사뭇 다른 성정을 가진 큰 공주에게 배운다.


격정 대신 이성으로. 흥분 대신 이해로.



집 앞에 펼쳐진 강과 산을 바라보며 산불로 인해 인명 피해와 더불어 속절없이 당하고 마는 나무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산불로 상처받은 나무들처럼, 우리의 감정도 때로는 불타오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는 여전히 떠오르고 온 세상을 골고루 밝혀준다. 모든 상처 위에 따스한 빛으로 치료라도 하듯,


분노할 일이 생기면 크게 심호흡을 세 번 하면서 나 자신을 다스려야겠다. 오늘도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조금은 부드럽게, 조금은 지혜롭게,

KakaoTalk_20250326_084735776_02.jpg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中


KakaoTalk_20250326_084735776_01.jpg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이다 中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의성 산불, 안동까지 확산, 자연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