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
누구를 위해 필사를 하나?
137일째 필사를 하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비가 내린 후 창문 밖 세상이 깨끗해진 것처럼, 내 마음도 필사와 함께 맑아진다.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필사를 한다."
솔직한 고백이다.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의식. 나에게 잘 보여야 꾸준히 할 테니까. 이 단순한 진실이 매일 아침 펜을 들게 한다.
언어의 한계에 도전하는 중이다.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넣듯, 하루에 하나의 언어를 저축한다. 처음에는 그저 습관이었는데, 어느새 나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꾹꾹 눌러쓴 한 문장, 한 단어가 내 속에 스며들어 쌓이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한다. 지붕 위에 올라간 후에는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고. 그럼 지붕 위에 올라간 사람은 어떻게 하지?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맴돌면서 사색을 하게 한다. 아파트 문화 덕분에 이제는 지붕 위에 올라갈 일이 없지만, 옛 시절 기억은 생생하다. 친정집은 슬래브 집이라 옥상이 있어 계단을 타고 올라갔고, 시댁에서는 기와지붕 위에 주렁주렁 열린 박을 따기 위해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이 평범한 일상이 모두 추억이고 글감이다. 소중하지 않은 일상은 없다. 일상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서 비로소 알게 된 진실이다.
미움받을 용기를 낸 일본의 야구선수 오타니처럼, 나도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오타니의 미움받을 용기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이 성공할 것을 알아차림. 그는 이미 알고 있었기에 기꺼이 미움받을 용기를 선택한 건 아닐까, 오타니만 가능한 것일까? 아니다. 누구라도 가능하다. 단지 도전하지 않을 뿐이다.
필사를 시작한 후, 처음에는 가족과 지인들이, 지금은 나 자신까지 변화를 알아차리고 있다. 누군가는 시기하고 질투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나는 필사를 통해 잘 될 것을 알고 있기에 미움받을 용기를 장착했다. 이것이 진정한 정신승리다.
여동생 딸의 결혼식 날이다. 아픈 여동생을 대신해 엄마 마음 가득 담아 축하해 주러 가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 중이다. 집안에 행사도 있는데, "필사는 나중에 하지 뭐, " 하는 핑계를 만들고 싶지 않아 다른 날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났다. 첫새벽 공기를 마시며 종이 위에 글자를 새긴다.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합체했다. 외식도 하고, 인생 네 컷 사진도 찍고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도 보면서 가족의 화합을 다졌다. 덕분에 늦게 잠들어 피곤했지만 정신은 육체를 이겼다. 진정한 정신 승리다.
매일 뜨는 해처럼 나의 필사도 멈추지 않는다. 묵묵하게 흐린 날도, 맑은 날도 세상을 밝히는 해를 보며 아침 필사를 계속하리라 다짐한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멋진 풍광이 기다린다. "감사합니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일상의 사다리를 놓아두고, 심지 있게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 담는다. 사다리는 던져버렸지만, 나는 여전히 지붕 위에서 더 넓은 세상을 본다. 필사라는 사다리가 내게 보여준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