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도 온도가 있다고 한다. 차가운 말은 서리처럼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따뜻한 말은 봄볕처럼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다. 오늘 아침, 하얀 뭉게구름이 하늘을 수놓는 모습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내 언어의 온도는 과연 몇 도일까?
창문 너머로 보이는 구름들은 매일 다른 작품을 완성해 간다. 어제의 양과 오늘의 코끼리가 내일은 또 무엇이 될지, 하늘은 그렇게 끊임없이 변화한다. 하지만 우리의 말은 어떤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도 다른 결과를 기대하고 있진 않은지.
"엄마, 오늘도 잔소리야?" 아이의 한마디에 가슴이 서늘해졌던 그날을 기억한다. 내가 건네는 조언이 아이에겐 그저 귀찮은 잔소리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내 말의 온도가 미지근했기 때문은 아닐까. 진심을 담지 못한 언어는 공허한 메아리처럼 허공을 떠돌 뿐이다.
아이들은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부모의 진심 어린 걱정과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말의 차이를.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른들의 시도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그들의 귀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예민하다.
"조금만 참아, 곧 괜찮아질 거야."
허기진 친구에게 이런 말을 건넸던 적이 있다. 그의 눈빛이 일순간 흐려지는 것을 본 후에야 깨달았다. 배고픈 이에게 참으라는 말은 고문과 다름없다는 것을. 찐빵 하나라도 먼저 건네며 허기진 배를 깔딱 요기로 채워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위로였음을.
살다 보면 위로하고, 축하하고, 격려할 일들이 참 많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상대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이다. 말의 내용보다 때로는 그 말이 전하는 온기가 더 중요할 때가 있다. 마치 겨울날 따뜻한 온돌방처럼, 그 언어가 품은 온도가 상대의 마음을 데울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 열심히 사시는 교회 집사님이 계셨다. 늘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 지나칠 뿐,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삶의 무게를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그러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한 순간에 낯선 단어 미망인이라 불리고 있었다. 장례식장에 조문 오신 그 집사님의 손을 잡고 가장 먼저 한 말이 "집사님, 미안해요"였다. 막상 내가 기대던 나무그늘이 사라지고 보니, 그 집사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그전에 알아주지 못한 것이,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때로는 삶의 무게를 직접 짊어져봐야만 타인의 고통이 보이는 것일까. 그날 이후로 나는 타인의 표정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에 더 귀 기울이게 되었다.
자연은 묘한 조화를 이룬다. 비가 내리고 햇살이 비추고 구름이 떠다니는 모든 순간이 어우러져 우리가 편히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그렇다면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살 만한 세상이 된다.
오늘도 어김없이 광선을 보내주는 해의 온도를 온몸으로 느끼며 다짐한다. 해처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언어의 온도를 전하며 살아가리라. 진심을 담아 건네는 한마디가 얼어붙은 마음에 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언어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힘이 아닐까.
구름은 하늘에서 매일 새로운 작품을 완성해 간다. 나의 언어도 그러하길. 같은 말이라도 온기를 담아 전할 때, 다른 이의 마음속에 따스한 구름 한 조각으로 머물다 가길. 진정한 위로는 그렇게 전해지는 것이니까.
언어의 온도.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끊임없이 맞춰가야 할 소중한 체온과도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때론 직접 아픔을 겪어보아야만 타인의 고통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