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 겹쳐진 얼굴

by 서강


비는 오래 내렸다.

해안 쪽에서 끌어올린 바람이 물기를 머금고 골목을 훑고 지나가면, 아스팔트 위 네온들이 길쭉하게 찢겨 흩어졌다. 자정이 넘은 시간, 코인세탁방 문턱은 여전히 환하게 깨어 있었다. 드럼통들이 낮은 울림으로 회전했고, 바닥에는 방금까지 발길이 남긴 물자국이 얇게 말라가고 있었다.


윤세하는 마지막 바구니의 셔츠들을 기계에 밀어 넣고 코인을 셌다. 동전들이 손바닥에서 서로를 두드리는 소리가 유리잔에 부딪힌 얼음처럼 맑았다. 그는 ‘표백’ 버튼 위에서 잠깐 손가락을 멈췄다. 너무 흰 건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흰색이란 건 대개 무언가를 지워서 얻는 빛이니까.


쾅—. 문이 튀듯 열렸다.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가 빗물을 등에 매달고 들어왔다. 우산 끝에서 국자처럼 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는 말없이 세탁망을 열어 젖은 셔츠를 꺼냈다. 동작이 정확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많이 해본 사람의 손놀림인데, 이상하게 그 손엔 노동의 굳은살이 없었다.


“비, 아직 그치지 않았나 봐요.” 윤세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남자가 고개를 움직였다. “끝이 있는 것들은 오래가죠. 우리가 끝났다고 느끼기 전까진.”


목소리는 낮고, 문장마다 호흡을 골라 넣는 느낌이었다. 바람에 젖은 머리카락 몇 올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드럼창에 비친 거품을 보다 눈길을 옆으로 돌리는 순간, 유리 표면 위로 포개진 두 얼굴이 흘렀다. 놀랍게 닮았다기보다, 서로의 선을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남자가 셔츠 한 장을 건네다 놓쳤다. 바닥이 젖어 있어서였을까. 면이 얇게 미끄러졌다. 윤세하가 재빨리 손을 뻗어 줍고는 자신의 셔츠 더미 위에 올려놓았다. 잠깐의 혼선.
그 혼선은 생각보다 쉽게 정리되지 않았다.


“구별이…” 남자가 웃었다. 입가만 움직이는 웃음이었다. “잘 안 되겠군요.”


“흰 셔츠는 다 흰 셔츠니까요.” 윤세하도 따라 웃었다. “누가 입어도 표가 안 날 겁니다.”


그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농담이 아닌 말들은 늘 농담 같은 표정을 하고 나타난다. 두 장의 셔츠는 같은 드럼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이 닫히고, 물이 차오르며 거품이 오르내렸다. 거품은 두 장의 삶을 같은 물에 담갔다.


세탁방 벽에는 길게 금 간 거울이 있었다. 낮에 온 손님 중 누군가가 아이의 유모차를 거칠게 돌리는 바람에 생긴 금이었다. 금은 갈라진 채로, 오히려 더 선명하게 반사했다. 윤세하는 그 거울 속의 자신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겹쳐진 윤곽, 비슷한 눈매, 다른 빛깔의 침묵.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피가 아닌 무늬가 만든 닮음.


남자의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이 번쩍하고 켜졌다가 곧 암전.
다시 울림. 그리고 또 한 번.


“괜찮으세요?” 윤세하가 물었다.


“오늘이 끝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남자는 시계를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끝나야만, 시작되니까요.”


드럼이 멈췄다.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은 무심한 척 손에 잡히는 셔츠를 나눠 들었다. 빗물 냄새가 옅게 배어 있었다. 서로의 셔츠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들이 주인을 바꾸는 일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 순간에는 알지 못했다.


남자가 먼저 나갔다. 우산을 펴는 소리, 바깥 빗줄기와 포개지는 발걸음. 윤세하는 문턱까지 따라나갔다가, 들어오며 꺼놓았던 자신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진동.
잠금화면에 익숙지 않은 알림 하나.


[오늘 0시. 대역 계약. 장소 동일.]


한 줄의 문장이 주머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와 심장을 건드렸다. 그는 자신의 노트를 꺼내 ‘대역’이라는 단어를 적어두었다. 대역: 내가 아닌 내가 나 대신 살아주는 일.


유리문이 다시 열렸다. 아까의 남자가 돌아와 검은 지갑 하나를 내밀었다.


“아마, 이건 당신 거겠죠.”


지갑 겉면에 금박으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류원.
윤세하는 어딘가 어긋났다는 느낌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가 쥐고 있던, 낯설지 않은 또 다른 지갑의 금박 글씨—윤세하.


“우리가 닮아서 그럴 겁니다.” 남자가 말했고, 이번엔 웃음이 조금 더 길었다. “이름이 갈 곳을 잠시 잃은 거죠.”


그때, 세탁방 바깥에 검은 우산이 두어 개, 동시에 펴졌다. 우산이 만든 둥근 그림자들이 유리 위에서 겹쳐졌다가 갈라졌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방금 광택을 낸 가죽, 비에 젖지 않는 정장, 말을 고르는 사람들의 공기.


문이 열렸다. 맞춤 재단된 검은 양복, 일정한 빛깔의 넥타이, 눈빛의 각도가 거의 같은 남자 셋. 가운데 선 남자가 반 발짝 앞으로 나왔다.


“부회장님, 모시겠습니다.”


윤세하는 웃을 뻔했다. 그 단어의 무게가 우스웠다. 그러나 웃음은 목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분명 그—방금 나간 남자—여야 했다. 그런데 왜.


“잠깐만요—” 그가 말을 붙이려 했으나, 이미 한 남자가 그의 어깨에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코트의 안감이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부드러움은 때로 힘보다 더 단단하게 사람을 붙잡는다.


유리문 곁, 금 간 거울이 그 장면을 비추었다. 금의 선을 따라 그의 얼굴과 남자의 얼굴이 한 인물처럼 겹쳤다. 윤세하는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 얼굴은 확실히 다른 사람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전부 낯설지는 않았다.


그는 발걸음의 방향을 잠시 생각했다. 뒤돌아 세탁기의 ‘마침’ 버튼을 눌렀다. 그다음, 문턱을 넘었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 2화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