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두 개의 셔츠

by 서강


아침이 아닌 빛 속에서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밀려 들어온 건 해가 아니라 바다였다. 유리벽 너머로 길게 누운 수면, 먼 항만의 크레인이 검은 실루엣으로 꽂혀 있었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밤을 조금 남겨 흔들렸고, 바닥은 발을 내디디는 소리를 흡수해 삼켰다.


윤세하는 낯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트의 감촉이 구름 같아 발목이 바닥을 찾는 데 몇 초가 더 걸렸다. 베드사이드 테이블 위엔 카드가 두 장 놓여 있었다. 하나에는 류그룹 VIP, 다른 하나에는 PENTHOUSE 63. 휴대폰을 켰다. 알림이 일렬로 서 있었다.


[08:30 이사회 프리브리핑 / 09:15 MOU 서명식 / 12:00 오찬 동석 / 14:40 내부 안전 점검 보고]

그의 심장도 그 시간표처럼 규칙적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전날 밤, 세탁방에서 울렸던 문자 한 줄—대역 계약—이 기억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윤세하는 옷장을 열었다. 잘 다려진 셔츠들이 색과 간격으로 정렬되어 있었다. 그는 어젯밤 바꿔 입은 셔츠를 들었다. 안감 라벨에 펜촉을 세워 아주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내가 여기 있었다’는 표식. 가짜가 남기는 진실의 점.


문이 울렸다.
검은 정장을 입은 젊은 여성이 약간 고개를 숙였다. 완만하고 정확한 미소.


“모시러 왔습니다, 부회장님.”


그의 목구멍 어딘가에서 작은 금속성 소리가 났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 오늘 하루만. 오늘 하루만이라면, 나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 거울 앞에 서서 단추를 잠그며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자리를 모방하려면 어조부터 모방하라. 말은 자리를 닮아가니까.


엘리베이터 유리 너머 도시가 아래로 흘렀다. 그가 숨을 들이쉴 때마다 유리 위의 자신의 얼굴이 아주 조금 흐려졌다 또 선명해졌다. 오늘의 류원이라는 가면은 생각보다 얼굴에 잘 붙었다. 가면이 얼굴을 덮은 게 아니라, 오히려 안쪽에서 얼굴을 떠받치는 느낌.


“자료는 간략히 정리했습니다.” 비서가 파일을 건넸다. “오늘 서명식은 외부 공개 일정으로 전환됐고요.”


“안전 점검 보고—과거 사고 기록은 포함되어 있습니까?” 윤세하가 물었다.


비서는 눈썹을 아주 미세하게 올렸다. “공식 기록은—정리된 범위 내에서만.”


그 말의 여백을 그는 이해했다. 공식은 언제나 비공식을 남겨둔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을 볼 겁니다.”

그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기도 했다.


같은 시간, 좁은 천장에 붙은 곰팡이 얼룩들이 별자리처럼 보이는 방에서 류원은 눈을 떴다. 낯선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라면 스프와 먼지, 공유 샤워실의 축축한 수건, 새벽에 누군가 구운 고등어의 잔향. 그는 몸을 일으켜 창문을 밀었다. 골목 아래로 푸드트럭이 철판을 닦는 소리가 들렸다.


주머니에서 나온 키에 얇게 새겨진 글자 하나—문턱.
그는 그 단어를 손바닥에서 굴리다시피 했다. 어젯밤, 문턱을 넘은 건 누구였나. 자신인가, 아니면 그의 자리가 그를 넘어섰나.


복도 끝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성급하고 짧은 리듬.
“윤세하 씨? 오늘은 받아야겠는데요.”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입술로 그 이름을 곱씹었다. 윤세하. 이름이 혀끝에 얹히는 감각은 생각보다 뜨거웠다. 빚이라는 단어와 이름이라는 단어가 그 순간 같은 무게로 내려앉았다.


문을 열지 않았다. 대신 계단을 내려가 골목으로 나왔다. 비는 거의 그쳤고, 하수구 뚜껑 사이로 물이 처량하게 빨려 들어갔다. 코인세탁방 문턱의 네온이 낯빛에도 희미하게 살아 있었다.


문이 열렸다. 바리스타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그를 보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세탁방 맞은편 카페의 장해윤이었다. 눈빛이 선명했다. 누군가를 오래 관찰하는 사람의 눈.


“어제,” 그녀가 낮게 말했다. “거울 앞에서 셔츠를 바꿔 입은 사람을 봤습니다.”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실을 규정하지도 않는 몸짓.

“이쪽으로 와요.” 해윤이 손목을 가볍게 끌었다. 카운터 뒤 작은 방, 커피 원두 자루가 쌓여 있고 오래된 모니터가 한 대 있었다. 그녀가 USB를 꽂았다. 화면에 밤의 세탁방이 나타났다. 유리문, 검은 코트, 젖은 바닥. 카메라 각도가 묘하게 좋았다. 누군가 일부러 연출한 것처럼.


“각도가 너무 좋아요.” 해윤이 말했다. “우연에겐 이런 구도가 잡히지 않아요.”


재생바의 시각이 23:58에서 00:00으로 넘어갈 때, 파일 목록에 작은 새 파일 하나가 생겼다. 대역_0시. 마치 누군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정시에 생성된 기록.


류원이 마우스를 쥔 손에 힘을 줬다. 클릭 직전, 해윤이 손등을 눌렀다.
“지금은 보지 말아요. 타이밍을 잃으면 증거는 그냥 영상이 돼요.”


그 말에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해윤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흔들리는 것들이 많을수록, 사람은 더 단단해지거나 더 쉽게 부서진다.


유리문 그림자가 길어졌다. 검은 모자와 장갑, 말끔한 미소의 남자가 문턱을 넘었다.
“CCTV 교체 요청 들어와서 왔습니다.”


해윤과 류원은 서로를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공유되는 의심.
류원이 웃음을 억지로 만들었다. “교체는 다음에 하죠. 오늘은 우리도—기록이 필요합니다.”


남자의 미소가 얇아졌다. 장갑 손가락 끝이 닳아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치운’ 손.
그의 시선이 방 한편, 오래된 모니터의 전원을 잠깐 스쳤다. 그리고 아주 짧은 시간, 그 눈동자의 깊숙한 곳에서 어떤 명령이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그럼, 연락 주십시오.” 남자는 명함만 남기고 돌아섰다. 문이 닫히는 소리, 바깥에서 짧게 울린 자동차 리모컨의 경고음.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계속 보고 있다는 사실이 도시의 소음 속에 끼워 넣어졌다.


“당신은 누구예요.” 해윤이 물었다. “정확히 말해서, 오늘의 당신은 누구예요?”


류원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대답했다. “오늘은… 윤세하입니다.”


그 말은 선언이자 고백이었다. 이름을 빌려 쓰는 일이 아니라, 오늘 하루만큼은 그 이름의 무게를 맡아 들겠다는 약속.


펜트하우스의 유리 엘리베이터가 지상으로 미끄러졌다. 윤세하는 리허설처럼 짧은 문장들을 머릿속에 세워보았다. 자리엔 자리의 언어가 있고, 언어엔 언어의 리듬이 있다. 프리브리핑 룸에 들어서자 전략기획실 오지현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켜졌다. 또박또박한 발음, 미소의 각도. 준비된 사람의 표정.


“부회장님, 오늘 안건은 항만 스마트 물류 MOU 리스크 검토입니다.”


윤세하는 슬라이드의 구석을 훑었다. 각주, 누락된 표본, 과거 사고 기록의 빈칸. 구석은 늘 진실을 가린다. 그래서 사람은 구석부터 본다.


“이건,” 그가 말했다. “과거 야간 추락 사고와 질식 사고 데이터가 빠져 있군요. 공식 기록에 없더라도, 보험 심사 보고서와 교대일지엔 발자국이 있을 겁니다.”


회의실 공기가 한 번 흔들렸다. 오지현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확인하겠습니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이름 없는 발신.
[익명: 당신이 ‘진짜’가 아니라는 증거. 거래 가능.]


윤세하는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가면이 얼굴을 떠받치는 감각이 다시 돌아왔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가짜가 해야 할 일은, 진짜보다 더 진실해지는 것뿐.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릴 때, 유리벽 너머로 바다가 스치며 지나갔다. 바다는 이름을 묻지 않는다. 다만 오늘의 파도를 올리고, 내일의 파도를 준비할 뿐.


문 앞에서 비서의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부회장님,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턱을 넘었다.


— 3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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