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글 Aug 02. 2023

내성적이지만 춤은 추고 싶어

난 슬플 땐 힙합을 춰

첫 시작은 대학교 1학년, 새내기 시절로 돌아간다. 여전히 낯을 가려 1학기 때 여기 저기 홍보 부스를 통해 들어갔던 동아리들은 금방 나오게 되었다. 통기타 동아리, 발명 동아리, 봉사 동아리 등 종류도 참 다양했다. 왠지 모르게 전부 재미가 없었다. 처음 본 사람들이 나이가 더 많다는 이유로 선배가 되고, 그로 인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하 관계가 형성된다. 후배는 눈치를 봐야 하고, 선배는 후배를 관리해야 한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멘토링을 해줄 수 있다는 취지로 보자면 참 좋았겠지만, 그로 인해 누군가는 잡일을 도맡아 해야했고 도움 안 되는 쓴 소리를 술 한 모금과 함께 삼켜야 했다.


그런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마찬 가지였다. 선생님이라고 항상 옳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학생이라는 이유로, 또는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그 의견은 무시 당한다. 때로는 반항이라는 이유로 체벌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래서 입학 때부터 배정해 준 또래들과 가까워졌던 것이었다. 같은 학년이라는 이유로 동등한 위치에 있는, 알게 모르게 생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서열을 제외하고서는 평등한 관계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청춘이라고 불리는 20대 초반을 그렇게만 보내기엔 다소 아쉬웠다. 1학년 2학기가 되어서는 학기 초부터 도서관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동아리 홍보 부스들을 다시 기웃거렸다.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스트릿 댄스 동아리였다. 댄동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댄스 동아리에서 홍보를 위해 힙합을 크게 틀어 놓고 리듬을 타며 몸을 흐느적거리는 선배들을 보았을 때에는, 이전의 그 느낌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무언가 자유로운 영혼, 반항심이 느껴졌고, 무엇보다 멋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거다 싶었다. 마침 같이 놀던 무리에 있던 친구가 그 동아리에 속해 있었고, 친구를 통해 어렵지 않게 동아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봤을 땐 그저 자유로워 보이고 멋있어 보였는데, 그 속사정은 예상과는 달랐다. 그런 몸짓을 보여주기 위해 수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연습에 몸을 갈아넣어야 하는 것이었다. 무대에 선다는 것은 관객들에게 평가를 받는 일이었기 때문에 분위기도 사뭇 경직되어 있었다. 대학 입학과 상관 없이 동아리에 들어오는 순서에 따라 또 다른 선후배가 결정되었고, 3학년 선배가 2학년에게 존대를 하는 우스운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가을 쯤 있을 무대에 서기 위해 연습을 시작했다. 생전 처음 춰보는 춤이었다. 내 몸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몸 한 부분에 집중하고 있으면 표정은 볼 만하게 일그러지곤 했다. 하지만 함께 공동의 목표를 위해 땀을 흘리고 같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꽤 좋은 경험이었다. 누군가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서로 나서서 도와주었고, 능숙한 선배들의 모습은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던 멘토의 모습이었다.


아직 완성도 채 되지 않았지만 무대에 서는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함께 어울리던 친구들은 흑역사로 남긴다며 내 서툰 춤 실력을 보기 위해 관객석 정중앙을 채워주었다. 이 때 찍은 영상은 아직도 언급되며 나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된다. 반복해서 연습하던 5분 정도의 공연이 화려한 조명 아래서 이뤄졌다. 생전 처음 비비크림을 바르고 머리에 왁스를 발랐다. 조금이라도 멋있어 보이기 위해 가수의 표정을 따라하기도 하였지만 얼마나 어색한 모습이었을지 직접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눈 깜빡한 사이에 공연은 종료 되었고 박수와 함께 내려올 수 있었다. 


이 때가 관심을 받는다는 기분을 느끼게 된 시작이었으리라.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그들에게 연습한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은 썩 기분 좋은 일이었다. 조명을 받고 어두운 객석에서 바라보았을 때 밝게 빛난다는 것은 어두운 길을 항해하는 어부들에게 빛을 내는 등대가 되어주는 것과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물론 그들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었지만. 시간을 내어 연습을 하고, 내가 못하는 것을 해내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된다는 것. 그 것은 이 때부터 조금 씩 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내성적이지만 관심은 받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