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하던 영화 <오펜하이머>를 어제서야 볼 수 있었다. <테넷>, <인셉션>, <인터스텔라> 등, 놀란 감독의 영화는 항상 웅장한 음악과 함께 그가 만든 세계관 속으로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번 영화 또한 3시간의 매우 긴 러닝 타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 긴 시간을 내가 기대하는 무언가로 가득 채워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두 인물의 관점에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컬러일 때는 오펜하이머의 시점, 흑백일 때는 미국 원자력의원회 의장인 스트로스의 시점으로 말이다. 오펜하이머는 비상한 머리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강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고, 스트로스는 이런 오펜하이머를 시기하며 그의 영향력을 뺏어버리려 한다. 원자폭탄을 만들려는 과학자들의 열정적인 모습과, 그것을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과 군인의 모습이 대조되며 나타난다.
오펜하이머는 수많은 미국 시민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전쟁을 끝내고자 원자폭탄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미국을 강대국으로 만들어주는 무기가 되어주었으며, 그 본보기를 하려는 듯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이로 인해 원폭 사망자 8만, 방사능 사망자 70만이라는 경이로운 수의 사람이 죽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이로 인해 강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이를 무기로 사용하지 말고, 서로 투명하게 정보를 공개해야 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로 인해 간첩으로 몰려 보안 인가를 박탈당하고, 노년에 후두암에 걸려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수많은 목숨을 살린 영웅보다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사람에게 더 어울리는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를 비난할 수 있을까. 자원을 채굴하기 위해 광산에 사용할 목적으로 발명된 다이너마이트도, 인간은 결국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데에 사용하고 말았다. 원자가 쪼개지며 중성자가 방출되는 강력한 힘이라는 미시세계의 놀라운 현상도, 결국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전쟁의 무기로 사용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것을 만든 사람과 그것을 사용한 사람 중 누구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는 것일까? 그렇게 사용될 것을 알고서도 만들었다면 그 책임이 조금 더 증가하는 것일까.
자국민의 목숨은 소중하고, 타국의 목숨은 소중하지 않은 것일까. 어쩌면 나를 가장 중요시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는 현대인의 모습이 국가적 크기로 발현된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런 선택을 한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을까. 강도가 집에 들어와 가족의 목숨을 위협한다면, 그의 목숨을 먼저 빼앗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을 가진 사람도 결국 죽을 때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목숨도 감히 앗아갈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것도 결국에는 모순인 것이다. 강아지와 고양이와 같은 동물의 권리는 강력히 보호하면서, 돼지나 닭, 소의 신체는 즐겁게 먹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에 가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가장 강력한 무기로 인해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다.
오펜하이머의 인생은 참 쓸쓸했을 것이다. 몇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과 신음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일을 자처했을 것이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었으므로. 나치의 손에 먼저 그것을 들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그래서 그는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알고서도 그 일을 했던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평화를 간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