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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Jan 31. 2021

왜 행복한 커플은 모두 엇비슷해 보일까?

《커플의 종말》을 읽고

《커플의 종말》 . 마르셀라 이아쿱 씀, 이정은 옮김. 책세상.

읽은 날짜 : 1/1~10 

한 줄 평 : 봉기할 수도 캠페인을 할 수도 없고 술자리에서조차 꺼려지는 주제인, ‘나쁜 연애’를 할 자유와 ‘미친 여자’가 되어 스러진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책.

책 속의 한 문장 : 사회는 내연 관계를 맺는 커플이 불안정하기를 바랐고, 이로 인해 안나 카레리나는 기차로 몸을 던져야 했다.(4장)     


거침없는 어조가 시원해서 좋기도 했지만, 논지를 따라가기가 다소 어려웠다. 내가 모르는 어떤 진전된 논의가 바탕이 되어서 그런 걸지도.


《커플의 종말》은 한국 사회에서 현재 논의되고 있는 ‘비동의 강간죄’, ‘시민연대계약’, 동성결혼, 여성의 임신중단권 등의 제도가 이미 정착한 현대 프랑스 사회를 배경으로,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부각한 개인들의 고독이 국가의 성(적 관계) 통제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 논설하는 책이다. 프랑스에서는 2006년 부부강간(동거, 시민연대계약 커플 포함)에 대한 형벌이 강화되어 일반 강간보다 5년 더 가중 처벌 당해 20년 징역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를 가리켜 국가가 성을 매개로 시민들의 관계를 통제하는 데 있어 “커플이 본보기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저자는 ‘애착 없는 섹스’, 1대 1 관계를 벗어난 내연 관계에서의 섹스, 폐쇄적인 공간에서 비밀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 섹스 등을 정책 변화에 따라 규정된 ‘나쁜 섹스’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어 과연 이 사회가 어떻게 개인들의 관계를 재단하고 ‘좋은’ 커플을 맺도록 유도하는지에 대해 파헤친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이 시스템의 설계 목적은 커플에게 자녀 양육의 책임을 오롯이 지우는 것이다. 특히 여성이 임신중단권을 포함해 자녀에 대해 많은 권한을 가지는 동시에, 학력과 임금 격차, 부계 혈연 강조 등에 따라 자연히 자녀의 양육을 더 많이 (심지어 어떤 경우는 홀로) 책임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런 가정에서 태어났느냐 저런 가정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운명이 이토록 좌지우지되는 상황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과연 용납될 수 있을까? (중략) 어머니가 처한 부당한 노예 상태까지는 언급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자격을 갖춘 기관에 자녀 교육을 맡기고 어머니와 아버지 역할은 일주일에 몇 시간 정도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때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양육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가능할 때 자녀를 애지중지 예뻐해 주는 일일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이렇게 거침없이 일갈하는데, 속이 시원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선 논의도 되지 못하고 있어 슬퍼지는 대목이다. 사교육과 돌봄의 경계가 점점 흐릿해지고, 초등학생들을 저녁에도 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게 하는 수준의 공공 돌봄도 노동자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는 문제가 논의되는 데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물론 노동자 처우 개선도 아주 중요한 문제지만, 어린이·청소년들에게 돌봄이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단순히 어떤 공간 안에 머무르게 하는 안전과 보호의 관점을 벗어날 수는 없는지 등의 논의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청소년운동은 돌봄, 공공 보육 관련해서 어떤 비전을 제시할 수 있을까. 프랑스에서 관련한 논의가 얼마나 진전되어 있는지 궁금해졌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해석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성적 관계를 맺는 여성의 삶은 고립과 의부증, 파멸로 이어지고, 세간에는 한 여성의 어리석은 선택과 광기만이 비춰진다. 그런 한편 비동의 강간죄에 대해서는 여성이 언제든 동의를 철회하고 남성을 고발할 수 있기에 남성에게 성적 관계에서의 위험 부담을 늘리는 한편, 여성이 성적으로 자유로워지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역사적으로 지배자/정부가 성적 관계들을 모호한 기준으로, 과도하게 처벌해 왔으며 현대 사회 역시 그 연장선에서 개인들을 스스로 관계를 조정하는 주체가 아니라 사법 권력에 호소하는 의존적 존재가 되도록 하며 관계를 분절시켜 왔다고도 한다.(아무리 읽어도 잘 이해한 것인지 의구심이 들어 책 전체를 두 번 연달아 읽었지만, 결국 이렇게밖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도 프랑스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렇듯 페미니즘과 자유주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지만 폴리아모리(다자연애)에 대해서는 상당히 냉소적으로 비평하고 있다. 부부 관계에 가족, 신분 등 여러 요인이 결합되어 있던 과거와 달리, 자유연애가 도입된 후의 커플 관계는 ‘사랑’이라는 불확실하고 변화하는 감정에 의존한다. 때문에 그 사랑이 분산되면 커플 관계는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에는 세 명이 다자연애를 하며 함께 사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모두 한 명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이 부분이 이 책에서 왜 필요한 건지 잘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꽤 공감했다. 이런 주장을 친구에게 전했다가 추천받은 책이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다.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리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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