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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Jan 29. 2021

유년기

스스로 불쌍히 여기지 않은, 그리고 이제는 부끄럽지 않은

어젯밤에는 자다 깨서 한참 울었다. 오랜 비밀이 들키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 하나쯤은 버려두고 가기로 할 거라는 불안감 때문에 그랬을까.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딘가 이상하고 부족해서 도저히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자라온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자기 연민 

                              -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  

나는 결코 야생의 것들이   
자신에게 미안해하는 것 보지 못했다
작은 새는 가지에서 얼어 죽어 떨어질 것이다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생각 추호도 하지 않으며    

  

스스로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이 시를 생각한다. 스스로 원망하고 미안해하는 순환에 빠지며 무릎을 끌어안기보다는, 추위를 견디다 가지에서 떨어지는 새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나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시간들이 어떤 뭉텅이로 묶인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시간은 열두 살, 열세 살 무렵까지의 어린이 시절이다. 거절당할까 봐 군것질거리를 조르지 못하고 대신 아빠가 벗어둔 바지 호주머니 속에서 담배 부스러기 섞인 동전을 훔치던 기억. 그 뒤로 한 번도 가족끼리 놀러 나가지 않았기에 기억 속에 평생 붙잡고 있는, 대학교 캠퍼스에서 호수의 붕어에게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 주던 일고여덟살의 어느 밤. 동생들은 어디론가 나돌고 우유 가방 속 열쇠는 자꾸만 없어지고 대문 처마 밑에 홀로 앉아서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다 해가 기울쯤 어김없이 울곤 했던 날들.


종일 놀고서 “오늘 책 열 권 읽었다”고 자랑하는 막내의 거짓말이 귀엽다고 생각해서 아빠에게 무심코 일렀다가, 그걸 빌미 삼아 아빠가 동생을 매가 부러지도록 때린 적이 있다. 그때 둘째와 함께 방문을 살짝 열고 그 광경을 숨죽여 지켜보던 난 울고 싶은데 야속하게 웃음이 나왔고, 그런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던 둘째의 표정을 잊지 못한다. 나는 무언가 고장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런 불안감은 내 어린 시절을 지배했다. 아홉 살, 열 살 무렵 나는 골방에 틀어박혀 인형을 나무 막대로 무지막지하게 때리기를 좋아했다. 아니, 꼭 그러지 않고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왠지 인형이 나에게 원한을 품었을 것 같아 동네 곳곳의 철책이 둘러쳐진 채 방치된 공터에 던져 넣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잔인하고 끔찍한 사람인 것 같아. 인형을 때리면서 되뇌었던 말들이, 그 때리는 손짓과 도구의 모양새가 부모나 선생들의 것과 똑같았다는 것은 지금 와서야 하는 생각이다. 


아빠는 자정이 가까이 돼서야 귀가하는 일이 잦았고,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이 말을 안 들어 힘들다며 빨리 오라고 했다. 아빠는 어떨 땐 과자를 사 들고 와서 나를 ‘우리 이쁜 공주님’이라고 불렀고, 어떨 땐 왜 엄마 말을 안 듣느냐며 한참 매타작을 했다. 두 가지를 연달아 할 때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떤 밤을 지나든 아주 졸릴 무렵 우리 세 남매는 엄마를 중심으로 다닥다닥 붙어 잠이 들었다. 나는 자주 엄마 팔베개 쟁탈전에서 패배했고, 아빠가 소외감을 느낄까 봐 어색하게 굳은 팔로 아빠를 안고 자기도 했다. 어떤 날은 까닭 모르게 외롭고 괴로워 가족들의 발치에 누워 혼자 울기도 자주 했다. 어쨌든 다음날 늦잠을 자고 지각하는 건 내 잘못이었고, 그걸 이유로 교실에서 창피를 당하거나 매를 맞는 순간에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지각했던 게 내가 게으른 탓만은 아니었을 거라는 이 생각도, 지금 와서야 드는 것이다. 실내화를 빨아오지 않거나 손톱이 길다는 이유로 맞는 것만큼은 그때도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보육원에 사는 아이들과 부모의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들이 자주 많이 매를 맞았다. 나는 그래도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되뇌이면서, 스스로 실내화를 빨고 손톱을 깎았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의 나날 동안 나는 분열되어 있었다. 어른들 앞에선 착하고 내성적이고, 말 잘 듣고 조용한 맏딸 또는 여학생이었고, 인형을 잔인하게 망가뜨리고 동생과 남자애들을 장난인 양 함부로 때리는 포악한 말괄량이이기도 했다(내 마음과 행동의 간극 때문에 소소한 감정의 교류가 있었던 남자애들을 숱하게 울린 건 지금 와서도 뼈아픈 일이다). 지금의 어린이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생각해 보면 당시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또래가 서로 내뱉었던, 가장 가슴을 후벼 파는 욕은 이런 말이었던 것 같다. “이 이중인격자야!” 


그렇게 하나하나 주워섬기다 보면 지루하고 우울하기만 해 아무도 곁에 남지 않을 것만 같은, 그런 이야기들이 여든아홉 개 정도는 있다. 어른들에게는 별거 아니었을 아이스크림 하나 사 주거나 용돈 만 원 주는 호의가, 나에게는 과분한 대접처럼 느껴졌고, 나는 고개를 숙이고 거절하거나 어떻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지 몰라 얼굴이 빨개지곤 했다. 나는 내가 먹고 싶은 걸 엄마에게 말하기보다는, 마트에 드러눕는 막내를 어르거나 윽박지르는 게 편한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다. 또래 남자애들로부터나 가족으로부터나 ‘잘난 체 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아주 부끄러웠는데, 그건 대체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답답했다. 그러지 않고 남들에게 애정을 구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날들, 나는 스스로 불쌍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알드 달의 《마틸다》에 나오는 것처럼 멋진 선생님이 나를 데려가서 키워 줄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물론 맞은 직후에는 누구에게라도 상처를 보여 주며 하소연하고 싶기는 했지만,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은 자고 일어나면 까맣게 잊을 수 있었다. 다만 나는 가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상을 했다. 모종의 이유로 부모가 죽고, 나와 동생들이 함께 사는 꿈이다. (어떤 사장도 시켜줄 리 만무하지만)아르바이트를 하면 얼마를 벌 수 있는지 계산해 보기도 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일주일에 한 번은 동생들과 셋이 시내에 나와 충장서림에서 밍기적거리다가 해질 무렵 36번 버스를 기다리며 오방빵을 나눠 먹으리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그런 상상을 하는 나조차도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지금 와서는 그만큼 강한 사람이었구나 생각한다. 


나는 대체로 나를 미워하고 하잘것없이 여기고 그것을 숨기고 싶어서 겉을 부풀리고 또 그만큼 부끄러워했다. 하지만 책 속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그 방법을 따라서 내 마음을 종이 위에 옮기는 데서 해방감을 느끼는 그런 부분만은 온전히 사랑했었다. 친구와 함께 하교하다 공사장에서 벽돌을 등에 지는 아빠를 보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달려가 알은 체 했던 순간(그 친구는 돌아보니 사라져 있었다)만큼은 두고두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었다. 누군가와 별로 친하지 않더라도, 그를 따돌리려는 분위기를 따르지 않고 평소처럼 대하려고 노력하던 행동들도 나름 자랑스러울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생을 때리는 부모를 향해 울부짖으며 저지하기 시작한 날도 유년의 어느 날이다. 그날부터 우리 남매는 비슷한 행동을 몇 번 해 내면서 어떤 끊을 수 없는 유대를 마음 한편에 지니게 되었으니, 그것은 서로가 맞을 때 말린 적이 있다는 자긍심이다. 이런 보잘것없는, 하지만 혹독한 외로움과 일정한 주기로 닥쳐 오는 방 안의/교실 안의 재난을 이기고서 지켜냈기에 소중한, 그때의 자긍심이 지금 나를 살게 한다. 어린 시절의 그 나는 지금의 내가 감히 불쌍해할 수도 자존감을 충분히 가지라고 다독일 수도 없는 한 사람이다. 스스로 추호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며, 전쟁과도 같은 일상을 공상과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낸 어떤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의 나를 불쌍히 여기거나 ‘만약’이라는 가정법을 쓰며 다시 살아 보고 싶어 하기보다, 가끔씩 생각날 때 그저 이렇게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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