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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Jan 20. 2021

대학 못 가는 사람들의 말

중학교 3학년의 나는 어떻게 하면 고등학교에 안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 골똘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는 교육복지의 일환으로 원하는 학생들이 저녁 6시, 또는 밤 9시까지 자습할 수 있도록 하는 방과 후 교실을 운영했다. 나는 3년 간 그 교실에 매일같이 9시까지 남는 개근생이었는데, 가장 큰 유인은 무료로 주어지는 저녁 급식이었다.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왠지 부지런하게 산 듯한 뿌듯함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3년째 되던 어느 날, 빼곡히 불이 켜진 고등학교 건물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난 10시까지는 못할 것 같아.” 


고등학교도 대학도 안 가겠다는 결심을 말하자 단짝 친구는 ‘너 미쳤어?’라고 했다. 엄마는 아빠에게 결정을 미뤘고, 아빠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며 울먹였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남들보다 현저히 이른 나이에 정상적인 생애주기에서 벗어났다. 어른들은 조용히 공부만 하던 애가 갑자기 이상해졌다고 했다. 그동안 어른들의 편애 속에 얼마나 오만하고 편안하게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자퇴한 후엔 대안학교를 다니고 싶어서 이곳 저곳 기웃거려 보았지만 학비 등의 이유로 결국 모두 무산되었다.


그런 와중에 자퇴를 하나의 선택이라고 응원해 주고, 대학 비진학을 ‘대학 거부’라는 폼 나는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아마 같은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더 외로웠을 것이고 어쩌면 후회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차이일까. 대학을 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는 자연히 멀어졌으니, 내 주위에는 대학을 거부한 사람들과 현재 대학 제도를 둘러싼 여러 차별과 불합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수가 없어 다닌다는 사람들만 남았다. 그리고 나는 왠지 그 밖의 어딘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듯하다.


“너도 대학 거부자잖아?”라고 물으면 나는 빙글빙글 웃으며 이렇게 말을 돌리곤 했다. “나는 대학 기피자인데? 아니, 포기자인가?” 갈 수 있는데 안 간 거라는 자긍심이 느껴지는 거부라는 말의 뉘앙스는, 나와 달리 맘먹으면 갈 수 있었을 것 같은 중산층의 (때로는 무려 ‘깨어’ 있기까지 한) 가정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듯했다. 부모의 지원 속에 대안학교를 다니고 원하는 진로에 대학 졸업장이 꼭 필요하지 않기에 대학 거부 수순을 밟는 사람과 같은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 망설여졌다. 특성화고에 진학했지만 전공과 연관 있는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는 대학에 진학해야 한다는 현실을 깨닫고 입시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오히려 동질감을 느꼈다.


아빠에게 안정적인 직업이 있었더라면, 그래도 나는 대학에 안 갔을까? 이런 상상을 하지는 않는다. 고모는 낮에 공장에서 일해서 야간 대학을 나왔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듣는 것은 지긋지긋했지만 그런 롤 모델을 제시받는 것이 특별히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략 이런 세 가지를 스스로 질문했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해도 취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상황에서 대학이 나에게 더 나은 삶을 보장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어차피 지금보다 부유해질 리 없고 평생 일하면서 살아야만 한다면,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학 졸업장 없으면 나를 써 주는 곳이 식당이나 공장 등 밖에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괜찮은가?” 그런 질문을 거쳐 대학에 가지 않고 어떤 떠밀림과 선택과 행운들 속에 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대학에 간다'는 말은 맥락에 따라 여러 의미로 들리는 말이다. 때로는 대학 졸업장 없이 가질 수 있는 직업들을 제대로 된 직업이 아닌 일, 기피해야 할 일로 여기는 것처럼 들린다. 물론 개인에게 차별을 감내하고 열악한 노동을 감수해야 한다거나,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열악한 노동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쉽게 잊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좀 더 솔직한 말을 하고, 듣고 싶다. 당신은, 우리는 어떤 일을 하고 싶지 않아 하는가. 사회적으로 어떤 일을 천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내가 직접 하는 것은 기피하는 모순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가? 대학을 가느냐 안 가느냐를 넘어, 차별 철폐를 말하는 나의 삶이 '적어도 OO보다는 높은 계급'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그럴 때, 대학 못 가는 사람들의 말도 더 잘 들릴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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