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의 편의점 식사는 과연 자유로운 선택일까?
* 2017년 5월 23일 광주드림에 연재했던 글을 옮겨 싣는다. 당시 나는 19살이었다.
최근 두 달 간 광주의 한 학원가 중심에 있는 프랜차이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 지역은 최근 맛집과 카페가 많고 골목이 예쁜 데이트 코스로 떠오른 한편, 주변 학교의 초중고등학생이 모여드는 유서 깊은 학원가이다. 이 지역에 카페가 많아진 이유 중 하나가, 자녀를 차로 통원시키기 위해 교습시간 동안 대기하는 부모들 덕분이라는 것이 인근 주민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속설이다.
이곳의 음식점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데이트나 나들이를 왔거나 근처에 직장을 둔 비청소년이 주로 가는 음식점과, 학원에 다니거나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초·중·고등학생이 주로 가는 음식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뒤의 부류는 앞의 부류에 비해 가격이 월등히 싸고, 파는 음식은 주로 라면 등의 분식이었다. 내가 일한 편의점 역시 뒤의 부류 음식점의 역할을 톡톡히 하는 곳이다.
‘선택’, 혹은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없음
편의점에서는 아주 다양하고 많은 수의 학생들이 식사를 했다. 그 중에서는 거의 학교에 다니듯이 정기적으로 오는 학생들도 상당수였다. 하지만 그들의 경제상황은 매우 다양한 것처럼 보였다. 부모의 신용카드로 가격에 구애 받지 않고 간식거리를 고르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대개는 가격을 100원, 50원 단위로 면밀히 비교하고 일행끼리 잔돈을 모으는 등 최대한 적은 비용으로 식사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
또, 내가 일했던 시간은 저녁시간이었는데 마치 급식실처럼 일정한 시간이 되면 어떤 학생들이 들이닥치고, 시간을 살피며 잠시 수다를 떨다가 시간이 다 되었다며 급히 다시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단지 가격이 적게 들기 때문일 뿐 아니라, 학원 교습 시간 사이 식사시간 안에 최대한 자유시간을 많이 누리기 위해 편의점의 간편식품을 찾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 역시 비슷한 식사를 했다. 처음에는 직접 집에서 도시락을 싸오려고 노력했지만 얼마 안가 흐지부지되었고,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식품이나 컵라면 등으로 저녁을 때우는 일이 빈번해졌다. 하지만 그 음식들은 때로 과하게 자극적이고, 복통과 설사를 불러오고, 내용물이 실망스럽고, 금세 다시 배가 고파졌다. 물론 3000원 대의 냉장면과 5000원을 넘지 않는 도시락, 2900원 짜리 생과일주스처럼 보다 질이 좋아 보이는 음식도 팔고 있지만 그것을 사 먹기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마 학생들에게도 부담감은 비슷했는지, 그러한 음식들은 주로 비청소년이 사갔다.
정크푸드, 패스트푸드를 먹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으니 자제하라는 청소년 대상의 교육과 캠페인이 학교 등 각 기관에서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청소년이 실제로 건강한 식사를 하기 위한 조건인 경제적 권리와 시간의 여유를 보장하기 위한 노력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부모(친권자)의 경제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누구보다 더 오래 공부할 것을 요구 받는 상황에서 진정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나와 같은 시간대에 바로 근처의 편의점에서 일을 하던 한 청소년은 나보다 1000원 이상 적은 4500원의 시급을 받고 일하고 있었다. 최저시급과, 그와 관련된 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문제를 제기하거나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이 곳이 아닌 다른 모든 곳에서 나이를 이유로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그는 일한 경력이 없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포스 사용법을 숙지한 후 면접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급 4500원을 받고 하교 후부터 밤 10시 반까지 선 채로 일하며, 포스 시재금액이 맞지 않을 때 사비로 충당한다. 시재가 자꾸 비면 해고당할까 봐 불안해서다.
청소년빈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만 18세 미만 청소년은 노동을 하기 위해 부모의 동의를 받아야만 한다. 계좌 개설 역시 은행에 따라 나이 제한을 두며, 부모가 출금하거나 해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처럼 경제적 권리를 빼앗긴 한편, 청소년의 학습과 사회활동 등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일진대 그에 대한 경제적 보상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상금 등을 제공할 때에도 문화상품권이나 학습도구 등 현금을 제공하는 것을 지양하는 문화가 존재한다.
이러한 사회제도 및 문화는 청소년은 경제적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 물질적 욕망을 가지지 않아야 한다는 편견과 꼬리를 물고 되풀이된다. 한편으로는 청소년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평균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여건을 빼앗고, ‘정식’ 사회 구성원이 아니라 ‘예비’ 구성원으로서 사회 및 가족의 시혜를 받는 존재로 위치시킨다. 그런 한편으로 어떤 청소년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임금 불안정 노동을 하며 살아간다. 나는 이것을 감히 비청소년의 사회로부터 면밀히 계획된 청소년빈곤, 곧 착취라 부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