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경 Jan 20. 2021

‘아이들 위한 촛불’ 대신 모두를 위한 촛불을

토끼가 같은 토끼한테 귀엽다고 하는 건 괜찮지만...

* 2017년 3월 21일에 광주드림에 연재했던 글을 옮겨 싣는다. 당시 나는 19살이었다. 


박근혜가 탄핵되었습니다. 광주 금남로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무려 20회나 열린 촛불집회의 결과입니다. 촛불집회를 준비한 활동가들의 노고와 시민들의 활발한 참여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의 산을 넘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앞에 놓여진 고개가 아주 많습니다. 오늘은 그 고개들 중 하나인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곱게 들리지 않는 이유


 한 활동가는 촛불집회의 한 장면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우스꽝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먼저 아동청소년을 무대로 불러서 왜 집회에 왔는지, 현 시국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는다. 그리고 비청소년 시위 참가자들과 비슷한 일반적인 대답이 나오면 기특하다고 하고, 뭔가 좀 특이한 대답이 나오면 그냥 다같이 웃는다. 이게 한두 번도 아니고 매 집회마다 고정코너로 계속 쓰이는 것 같다.’


 이 사례를 듣고 여러분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나요? 짐작이 가는 장면은 있는데, 해석이 크게 다르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은 구호들은 어떤가요?


 ‘아이들을 위한 촛불’

 ‘아이들아 미안하다’

 ‘아이들은 미래의 희망’



 이러한 구호를 듣고 외치며 어떤 사람들은 공감하고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 ‘아이들을 위한 촛불’을 드는 사람들을 떠올려봅시다. 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아마 ‘아이들’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은 구호를 외치며 함께 세상을 바꿔나가는 존재가 아니라, 구호를 들으며 어른들이 바꿔주는 세상을 기다리는 존재로 남습니다. 그 사이의 간극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칭찬과 징벌 사이 위태로운 줄타기


 지금도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또 가정에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억압당하고 있습니다. 집회에 나가기 위해 교사나 부모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면 징계를 당하거나, 교사에 의해 따돌림의 대상이 되고 맙니다. 반면 학교나 가족 측의 선호에 맞는 행동을 했을 때는 칭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11월 광주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내 게시판에 대자보를 붙이자, 광주고에서는 적극적으로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하고 학생들을 치사했습니다. 광주고의 한 학생은 당시 교사가 대자보를 쓴 학생들을 가리켜 ‘선배들의 4·19 정신을 이어받았다’며 칭찬했다고 말했습니다. 반면 작년 한 해 광주고는 같은 자율형공립고인 광주제일고와 모의고사 성적을 경쟁하며 1학년 학생들에게 강제학습과 체벌 등의 인권침해를 해왔습니다.


 이처럼 청소년들은 일상 속에서 비민주적 문화와 인권침해를 뼈저리게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정치적 행동은 비청소년에 의해 평가되고 칭찬과 징벌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을 탑니다. 그러한 행태를 정당화하는 근거는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다는 것입니다. 미성숙하기 때문에 ‘사람’이 누리는 권리는 아직 누릴 수 없고, 스무 살이 지나고 고등학교를 졸업해야만 성숙해져서 정치적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아 미안하다’ 류의 구호들은 그러한 ‘아이들’에 대한 억압을 깊이 반영하고 있습니다. 비청소년들이 청소년들에게 미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태까지 청소년들이 사회와 자신의 삶을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행동과 표현의 창구가 사실상 전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청소년이 그런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나이로 성숙한 사람과 미성숙한 사람을 구분해 미성숙한 사람에게서 참정권을 비롯한 많은 권리를 박탈했기 때문입니다. 평등을 지향하는 광장에서만큼은 다른 구호를 외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토끼 귀엽다” 호랑이의 칭찬 의미


 “토끼가 같은 토끼한테 귀엽다고 하는 건 괜찮지만 다른 동물이 귀엽다고 하는 건 실례에요.” (영화 ‘주토피아’)


 다시 앞선 사례를 봅시다. 사회자는 기특하다고 생각해서 기특하다 말했을 것이고, 청중들은 귀엽고 재미있다고 생각해서 웃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들과 다르지 않은 말을 했는데 유독 칭찬을 들을 때, 남들과 다른 말을 했을 때 의논이 진전되지 않고 웃음으로 멈춰져 버릴 때, 이 사람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까요? 만약 여러분의 발언이 이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면 어떤 생각이 들 것 같나요?


 호의에서 비롯된 칭찬과 환대도 때로 상대를 불편하게 하고, 위축되게 할 수 있습니다. 토끼와 호랑이처럼 한쪽은 상대를 귀여워하고, 한쪽은 상대를 두려워하는 관계는 결코 평등할 수 없을 것입니다. 평등하고자 한다면 서로 두려워하고, 서로의 두려움을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위한 촛불’은 ‘아이들’을 해방하지 못합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촛불을 드는 광장에서 ‘아이’는 존중 받는 시민으로 설 틈이 없습니다. 성숙한 ‘어른’과 미성숙한 ‘아이’로 구분하지 않고, ‘우리 모두를 위한 촛불’을 들기 시작할 때 비로소 해방이 시작될 것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