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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Jan 20. 2021

세뱃돈을 둘러싼 사정들

* 2017년 2월 7일 광주드림에 연재했던 글을 옮겨 싣는다. 당시 나는 19살이었다.


설이었다. 설이면 한 해 동안 집이 얼마나 가난해졌는지 알 수 있다. 이른바 세뱃돈지수라고나 할까. 세뱃돈 받기가 얼마나 어렵거나 눈치가 보이는지, 엄마 아빠가 시골에 가면서 봉투에 넣을 액수를 가지고 얼마나 옥신각신 다투는지, 최종적으로 나에게 쥐어진 세뱃돈의 액수는 얼마인지! 이런 지표들을 바탕으로 작년과 비교 통계하면 얼추 알 수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나빠졌구나. 내년에는 얼마나 더 나빠질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고 세뱃돈 세기에만 바쁠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부터 다 알아버리고 만다. 할머니가 주는 세뱃돈은 우리 엄마아빠가 준 용돈에서 떼어 주는 거라는 걸. 우리 아빠는 삼촌이 나와 동생들에게 세뱃돈을 줄 것을 염두에 두고 사촌동생들에게 세뱃돈을 건넨다는 걸. 결국 용돈만 따졌을 때 각 가계의 수입 지출은 어쩌면 쌤쌤에 가까운 셈이다.


 그렇다면 설날 이브에 책임 있는 가족원들이 십시일반하여 예쁘게 복주머니에 싸서 베개 맡에 둬도 되는 것 아닌가. 왜 괜히 불편하고 어색하고 관절 건강에 안 좋게 명명마다 절을 하고 지난 한 해 약 592847번 들었던 말을 한 세트 씩 들어야 하는 것인가. 게다가 돈을 주면서 하는 말이니 말대꾸하기도 어렵다. 어쩌면 세뱃돈, 그것은 가족 내 청소년 지배 구조의 존속을 위한 세뇌의 수단이 아닐까!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세뱃돈


 어쨌든 세뱃돈 문화가 가족 내부의 재분배에 기여하는 바가 큰 것은 분명해 보인다. 상당수의 청소년들은 설날을 통해 평상시 결코 쉽게 얻어지지 않는 액수의 돈을 얻는다. 그 돈을 통해 평소 벼르던 물건을 사거나, 독립이나 여행 등을 위한 자금을 모을 수 있다. 그러니 눈치가 보이고 꺼림칙하고 잔소리가 듣기 싫어도 수행을 하는 마음으로 세뱃돈을 향해 절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릎과 허리를 구부리고 손을 포개 이마를 받칩니다. 몸을 납작하게 하고 하나, 둘, 쉬고 일어나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게 벌립니다. 숨을 차분히 내쉬며 미소를 지어봅니다.


 하지만 세뱃돈을 받아도 섣불리 웃을 수는 없다. 부모가 위력을 사용해 세뱃돈을 빼앗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통장을 만들어 보관해준다 하더라도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많은 경우 부모(법정대리인)는 만 19세 미만 자녀 명의의 예금을 어렵지 않게 출금할 수 있다. 청소년이 직접 자기 명의의 적금을 해지하려 해도 법정대리인의 대동을 요구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반대로 세뱃돈을 지키기 위해 은행 계좌를 개설하려 해도 만 17세 미만은 거의 다, 17~19세도 간혹 법정대리인의 대동을 요구받는다.


 실은 ‘그것은 내 돈이다’ 쉽게 주장하기 어렵기도 하다.


 나는 열다섯 살 무렵까지 매년 겨울 세뱃돈에 저금통까지 홀라당 뺏겼다. 얄궂게도 설은 가장 가난한 계절인 겨울의 중앙에만 왔다. 어느 겨울날 방에서 몰래 돼지저금통의 배를 갈라 돈을 꺼내고 있었다. 삼촌이 가끔 건넨 배춧잎도 끼어있어 액수가 컸다. 엄마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기름 값이 모자라다고 했다. 내가 저항하자 엄마는 말했다. “그 돈이 니 돈인 줄 알아” 울음을 그칠 수 없는 이유를 찾다가 “저금통이 불쌍해”라고 내뱉었다. 엄마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50원 짜리와 10원 짜리는 나 쓰라고 남겨 주었다. 그것만 해도 1200원이 넘었다. 제일 친했던 친구를 문구점에 데려가서 먹고 싶은 걸 다 고르라고 했다. 우리는 심사숙고하여 가끔씩 벌레가 발견되지만 아무도 인터넷에 찍어 올리지 않는 어떤 과자들을 골랐다. 값을 치르기 위해 10원짜리 몇 십 개를 계산대에 쏟았고, 부끄럼을 많이 탔던 친구는 먼저 나가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는 분수에 맞는 일이었다. 친구에게 피자와 스파게티를 대접하는 일 따위, 통장에 독립 자금을 모으는 일 따위 초등학생에게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 돈은 처음과 끝이 같은 도미노처럼 부모가 노동으로 얻은 임금으로부터 온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기름을 때어 집을 데우고 설에 가래떡을 찌는 것은 가족을, 그러니까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돈을 벌수 없는 이들은 벌레 나오는 과자에 컵라면만 사먹고 끽해야 PC방 노래방에서나 놀면서 살아가란 말인가. 어째서 가족들의 고된 노동에 빌붙어 살 수밖에 없단 말인가. 자식도 부모도 단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답게 살 수는 없는 걸까?


 일상과 위기의 경계, 절벽위의 삶들


 청소년운동 단체는 이런 가난한 사람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단체이기에 정작 당사자들의 후원을 많이 받지 못한다. 그래서 그나마 세대 간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진다는 설과 추석에 특별 모금을 하고는 한다. 하지만 늘 조심스럽다. 세뱃돈은커녕 생계비 지원조차 가족들에게 바랄 수 없는 청소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탈가정청소년은 이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제도 때문에 계좌 개설을 포함해 거의 모든 계약을 비청소년 지인의 명의를 빌려 맺고 살아간다. 합법과 불법, 일상과 위기의 경계에서 절벽 같은 땅을 밟고 살아간다. 혹자는 그들의 삶을 ‘방황’이라 부르며, 안정된 삶을 찾아가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일시적이거나 모호한 것이 아니다. 그들 또한 지금 현재의 사회에서 살아가며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쪽으로 포함될 것을 요구하는 대신 그 경계에서 땅을 골라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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