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경 Mar 08. 2021

나도, 너도 바람같은 사람이라고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를 읽고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홍승은 씀(2020). 낮은산. 

한 줄 평 : 이렇게 솔직해도 되나? 세 명의 타인의 애정 생활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 버리게 된다.

책 속의 한 문장

: “나에게 사랑을 물었던 지현은 사랑을 ‘불안을 견디는 의지’라고 말했다.”(98쪽)

“당신이라는 바람을 내 손에 잡아 두지 않으려 했고, 나라는 바람을 상대도 움켜쥐려고 하지 않았어요.”(274쪽)     


이 책을 읽기 전, 나에게 폴리아모리, 다자 연애란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돈이든 시간이든 정신이든 연애에 남들보다 많이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꼭 한 번에 한 사람만 좋으란 법은 없지만, 한 명하고 연애하기도 벅찬데 어떻게 두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키나. 그리고 상대가 나만을 바라보지 않을 때 느낄 질투와 집착, 외로움과 서운함… 주변의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 겪으며 전해 주는 감정의 파고를 겪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커플의 종말》에서 프랑스의 페미니스트 칼럼니스트인 저자가 3명이 폴리아모리 관계를 맺으며 동거하는 것에 대해 ‘대개 관계에서 주도권을 쥔 한 명의 이기심 때문’이라고 냉소적으로 일갈한 것에 대해서도 공감했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집어 드는 내 심정에는 반발심이 섞여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두 명의 전폭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매력적이고 유명한 여성이 쓴 책이라는 데서 느끼는 불편함과 의심이 의식 한편을 차지했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나는 내 안에서 무언가가 바뀌었음을 느꼈다.      


편견만 내려 놓는다면 누구나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을만한 책이다. 이틀 컷하고 한 번 더 읽음.


“나에게 폴리아모리는 ‘비독점’과 ‘합의’를 위한 노력과 같은 말로 다가왔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의 고유성을 존중하고, 설사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더라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소통하고, 소유만이 사랑의 방식이 아님을 인정하는 관계.”(37쪽)
“아무리 깊이 사랑해도 우리는 언제나 서로의 얇은 벽을 넘지 못하는 타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관계는 지속하기 힘들었다. 결국 나는 혼자이고 우리는 잠시 함께 걸어가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내 마음으로 상대를 통제하려는 욕구를 눌러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정 부분의 체념과 인정으로 나는 조금 더 상대를 존중하며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39쪽)     


연애 관계에서 내가 가장 뼈아프게 느끼는 실수는, 내가 나에게 해 주어야 할 것과 상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구분하지 못 한 것이다. 스스로에게 닥친 시련에 잘 대처하지 못하고 있을 때, 상대도 나에게 실망하진 않았을까 노심초사하며 애정을 갈구했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듯할 때는 원래 자신의 문제로부터 비롯한 부정적인 감정들과 관계로부터 느끼는 열패감, 질투, 배신감이 뒤섞여 상대에게로 향했다. 당연히 관계가 좋게 끝날 리 없었고, 내 시련도 악화되어 있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내가 뭔가 못나고 그 사람보다 특별히 매력적이지 못해서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은 어떻게든 다르게 하고 싶었지만 자꾸 땅을 파게 됐다. 일대일 관계에서는 경쟁에서 진 자는 버림받게 되어 있었기에, 상대의 마음이 떠남에서 비롯된 이별은 실제로 패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어떤 사람을 좋아하다가 마음이 떠나는 것은 그 사람이 꼭 못나서는 아니었다. 또 동시에 여러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만큼 각각의 사람들에게 느끼는 감정이 약하고, 그만큼 소홀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일대일 연애(모노가미)일 때는 항상 그보다 강한 감정을 느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꼭 갈등을 겪지 않더라도 관계 내외적인 이유로 감정이 희미해지는 순간이 분명 있다. 억지로 애정이 전과 같음을 증명해야 할 때는 관계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렇듯 깊이 생각하지 않았던 나의 어떤 부분을 더 깊이 들여다보며 해방감을 느낀다. 또 《커플의 종말》에 대한 소감에서 이어지는 거시적 생각도 해 보게 된다. 현대에서 모노가미만이 정상적 관계로 굳어진 것은, 그전에는 남성만이 공식적으로 다중과의 관계를 누릴 수 있었기에 여성 인권 향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관계의 수평적 확장이 아닌, 경직된 이성애 모노가미만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 지금의 상황은, 개인의 성과 사적 관계를 통제함으로서 국민 집단을 관리하는 국가의 통치 방식이 성공적으로 정착된 결과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부모를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개인들의 삶이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근원적 불평등이 가능하단 말인가. 모노가미란 그 불평등을 기획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또 민중들의 유대가 가족, 연애 관계로 찢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기획된 거대하고 아주 미시적인 통제가 아닐까! 정돈되진 않았지만 이런 생각도 해 본다.


그럼에도 막상 내가 당장 폴리아모리 상황에 놓인다면 건강하게 관계를 유지하리라고 장담하진 못하겠다. 그리고 지금 모노가미를 지향하며 행복하다는 무수히 많은(그냥 세상의 전부인)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그냥, 앞으로 나와 함께 걸어갈 사람을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다른 좋은 사람 한 명(두 명도 생각해 봤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다)을 다른 한편에 두고 같이 걷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또 그 사람도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쉽지 않겠지만, 나도 당신도 서로에게 바람이라는 걸 안다는 말로 사랑을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왜 행복한 커플은 모두 엇비슷해 보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