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경 Jan 03. 2023

사람을 만나는 기쁨

2023. 01. 03. 초보 편집자의 일기

오늘은 직장 동료들과 새해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사무실 청소를 하자는 제안에 이기적이게도 내 책상을 뒤집어엎어 청소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금방 끝내고 사무실 청소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손을 대기 시작하자 끝이 없었다. 2019년 3월 입사한 이래 처음으로 내 책상 서랍과 책꽂이를 바닥까지 들어내서 청소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 편집장에게 받았던 엽서를 보고 내가 저버렸을 기대가 떠올랐다. 언젠가부터 1년치씩 보관해 두고 있는 회의 안건지들을 뒤적이다가 고충을 이해받지 못해 화가 나고 억울했을 때의 감정이 다시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작년 9월 저자 J를 처음 만났을 때 들고 가서 빼곡히 메모했던 약소한 기획안은, 연휴에 갑자기 떠올리며 '그거 버렸던가' 하고 걱정했는데 무사히 남아 있었다. 청소를 미룬 마음은 마음속에서 정리하기를 미뤘던 생각들이 담긴 기록들을 다시 들추기 부끄러움이기도 했다. 막상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내일은 보다 정돈된 마음으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한편, 사무실 청소는 미뤄졌다. 한 명은 부상 상태에 한 명은 안식월 중, 코로나 관련 결석자가 생긴 데다 나는 내 책상이나 뒤집어엎고 있으니 자연히 흐지부지된 것이다. 그런 나에게 눈치 하나 주지 않고 그냥 청소를 그만둔 대표와 편집장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무튼 사회성에 다소 결함이 있는 사원으로서 그들의 양해에 감사할 따름이다.


오늘은 시무식 외에 두 번의 다른 중요한 만남이 있었다. 편집장과 함께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인 저자 L을 만나러 가서 3시간 이상 대화를 하고,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알 수 있었던 사실만큼이나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 내가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 회의에 적응하기 힘들어한 이유와 비슷한 점에서 그도 힘들었다는 것이 마음에 깊게 남는다. 3년 동안 그걸 알아채지 못하다니. 나는 똑똑하고 단호한 사람들 사이에서 바보처럼 보일까 봐, 나는 주요한 회의 참여자가 아니며 회의를 보조하는 역할에 가깝다고 은연중에 스스로 깎아내렸기 때문에, 회의에서 질문하기를 포기했다. 못 알아들은 내용을 알아들은 척했다. 때로 긴장해서 아무 말이나 하고 곧바로 후회했다. 이제 L과 서로 비밀을 털어놓았으니 다음 회의에서는 보다 자유로운 바보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하나의 만남은 퇴근 후 동료 편집자들과의 만남이었다. 모 행사 자리에서 질의응답 시간에 상대가 편집자임을 알고 바로 말을 걸어 번호를 교환한 P와의 약속에, '한기호의 출판학교'에서 만나 동료가 된 신입 편집자 D와 늘 한번 만나고 싶다 생각하던 에세이스트이자 신입 편집자인 T를 초대했다. 신입 편집자인 줄 알았던 P는 꽤 여러 회사를 경험한 중견 편집자였고, (출판계에서 선배들을 만날 때 으레 그렇듯)한 마디 꺼낼 때마다 새로운 관점과 정보가 쏟아져서 정신없이 메모하기에 바빴다. D도 나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것들을 소화하기 바쁜 것 같았다. T는 내가 대학을 다니지 않은 편집자라는 데서 느끼는 자격지심에 공감하는 한편, 공장 노동자로 일한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나서 특정한 모습으로 담론장에 등장하기를 요구당하며 경험했던 마음들을 나누며 응원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응원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나중에 다시 만나서 물어볼 것이다.


마감 시간인 9시에 카페를 나와, D와 함께 6호선 응암순환행에 몸을 실었다. 나는 누군가 친절한 사람과 둘만 남았을 때 으레 그렇듯 혼자서 생각해도 될 찌질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문제없는 것 같은데요", 이어서 주눅 든 내 어깨를 조금 펴 주고 싶었는지 D는 이런 말을 던졌다. "다른 사람 말을 못 알아들었을 때 바로 되묻는 것 멋있다고 생각해요. 나도 못 알아들었는데, 하면서 고마울 때가 있어요" 어떤 회의에서는 별로 잘하지 못하는 걸요, 나는 부끄러워져서 또 우물우물거렸지만 속으로는 조금 안도했다. 편집위원회 회의에서 내가 질문을 제대로 하지 못한 건,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충분히 나답게 행동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온전히 내가 용기가 없었던 탓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말 조금 무책임한가. 하지만 나처럼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에게 나도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을 것 같다. 내가 왜 겁먹었고 그 겁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지, 앞으로 더 알아가고 싶다.


내일은 또 어떤 사람에게 연락하고 약속을 잡을까? 감기 몸살 때문에 숨 쉬는 것도 버겁게 느껴지지만 어느 날보다도 내일이 기대된다. 자고 일어나면 많이 아프지 않아서 부디 출근할 수 있기를, 하고 바라본다. 거꾸로 된 바람은 많이 빌었던 것 같은데 이런 바람은 조금 생소하다. 만남 속에서 나는 아마 오늘보다는 더 겁먹을 가능성이 높고, 그만큼 바보 같겠지만 어쨌든 나를 조금 더 알게 될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