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자 <모순>

동갑의 이야기

by 채서하

이 책을 읽게 된 사유는 아주 간단명료하다.

주인공도 나도 25살이기 때문이다.

새해가 찾아오며 25살이 된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이라며 SNS에 올라온 리스트에 쓰여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읽어봄직 했다.


잠깐 쓸데없는 배경 이야기를 더해보자면, 중3 국어 시간에 <원미동 사람들>의 '일용할 양식'을 배운 뒤로 나는 <원미동 사람들>의 광팬이 되었다. 사실 시작은 소설 속 인물인 김 반장이 좋아서 연작 소설을 다 읽었고(왜 좋아하는지는 기회가 되면 이야기하는 걸로), 그렇게 쭉 읽다 보니 재밌었다. 도파민 천국. 웬만한 막장 드라마보다 재밌다.


그래서 <원미동 사람들>은 한 번 본 콘텐츠는 절대 다시 보지 않는다는 나의 철칙을 깨부수고 3번 이상 읽어보게 만든 마성의 책이었다.


그런 작품을 쓴 작가의 책이라면 응당 읽어볼 가치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좋아하는 반찬을 아껴먹는 심리라도 작동했는지, <원미동 사람들> 외에도 양귀자 작가에게는 많은 작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읽는 것을 계속 미뤄왔다.


그러다 이번 기회에 읽어 보자는 다짐을 했지만...도서관에는 예약까지 꽉꽉 차 있었다. 근데 언제 뭐 때문에 이렇게 붐업된 거지? 아직도 의문이다. (이 의문은 차후 내가 책의 내용을 예측하는 것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나는 당근으로 새 책을 싸게 구했다. 당근 만세!


나는 성격이 급해서 책을 한 번 펼치면, <나니아 연대기> 두께가 아닌 이상 최대한 그 자리에서 완독해야 하는 병이 있다. 그래도 요즘은 강박이 좀 나아지긴 했는데, 당시에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어서 여행 전에는 다 읽기로 결심했다.

결과는 2일 만에 완독! 출국 전에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내가 출국 전에 기록해 둔 내용과 당장 떠오르는 생각들을 조합해서 정리해보려 한다.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나는 요즘 사람들이 열광하길래 최신작인줄 알았다. 그런데 책을 펼치자마자 첫 페이지에서 25살 안진진이 자기소개를 하는데 본인이 결혼 적령기란다.

엥? 하고 뒤표지를 급하게 열었다.

그렇다...90년대 작품이었다.


그래 이제 갓 태어난 기린처럼 후들거리며 사회에 겨우 첫 발을 내디딘 내가 결혼적령기 나이라면 그것은 아주 큰 문제가 아니겠는가.

물론 어릴 때는 26살에 결혼하고 싶다는 터무니없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 헛생각도 다 지난 일이다.


그렇게 같은 25살이지만, 다른 사회에 속한 사람으로 안진진을 마주했다. 사회의 변화는 정말 빠르구나.


그러나 그녀가 겪는 고통은 현대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진진이의 장녀로서의 고통이 같은 장녀로서 너무나도 마음 아프고, 또 공감되었다. 세상 모든 장녀는 공감할 이야기이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 모순, p. 191


나 또한 과거에 두고 온 것이 너무 많다.

수많은 상처를 덮어두고 걸어왔다.

여전히 잘 봉합해 두었지만, 불현듯 문을 박차고 나올 때가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내 마음을 때리고 간 구절은 이 부분이었다.

과거에 내가 겪은 것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알아서 그때의 감정을 잘 여과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래야 과거에 얽매이지 않게 된다.


나도 꽤 오랫동안 과거에 얽매였었고, 증오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제는 모두 잊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결국 이해하고, 잘 매듭지었다.


그리고 안진진은 그것에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안진진이 여과시킬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큰 상처였어서.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 모순, p. 195

그래. 연애는 못 해봤어도 덕질은 많이 해본 사람으로서 공감되는 구절이었다.

그렇지만 다들 어쩜 그렇게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인지. 신기할 따름이다.

나도 꽤나 열렬히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보다 더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나는 쨉도 안 되는 것 같다.

정말 인생을 걸고 끝까지 달려가는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일단 나는 아직까지는 없었다. 덕질을 내 인생보다 우선순위로 둘 수 없었기에.


사랑이란 그러므로 붉은 신호등이다. 켜지기만 하면 무조건 멈춰야 하는, 위험을 예고하면서 동시에 안전도 예고하는 붉은 신호등이 바로 사랑이다.

- 모순, p. 210

이건 그냥 비유가 마음에 들어서.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한 채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감정을 극대화시키는 무엇이다.

- 모순, p. 218

이 구절은 읽으며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거짓말을 참으로 싫어하는 나이지만, 누군가에게 모든 진실을 솔직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그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 아닐까?

여전히 나는 내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나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타인에게는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특히 호감 있는 상대라면 더더욱.

(이성뿐만 아니라 친구 관계에서도)

간사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들도 진실을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

그 순간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는 언제나 의문이다.


이제 다시 내용 얘기로 돌아와서,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안진진이 자신의 입으로 자신의 생각을 뱉는다. 그녀는 두 썸남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고 말하지만, 아무리 봐도 맨 처음 두 남자를 소개할 때부터 진진이의 마음은 장우에게로 향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나영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나의 삐딱한 시선이 함유된 판단이기도 하다.

김장우도 딱히 마음에 쏙 드는 남자는 아닌데...(진진아 너는 왜 이런 남자들 중에 고민을 하니) 나영규의 태도가 특히 거슬렸다.

진진이의 서술을 거쳐 전달되는 만큼 객관성은 떨어지지만, 일단 내가 읽었을 때 그에게 있어 안진진은 원대한 인생 계획의 일부 같았다.


사람이 아니라 일종의 도구 같기도 했다.

내 인생의 퍼즐판을 맞춰보고 있는데, 안진진 네가 결혼 퍼즐로 적합한 것 같아. 내가 한번 잘 끼워볼게?

이러는 느낌?


그런데 안진진의 선택이 결국 나영규였다는 점에서, 그녀가 겪은 불안정성에 대한 공포가 얼마나 컸는지 체감되었다.


평생을 안정적인 울타리 안에서 보내온 이모가 우울감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그런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진진이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장우였으나, 결국 영규를 선택했다는 것이 가장 직관적으로 드러난 '모순'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모순'은 안진진이 혼자 쿵짝쿵짝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녀가 처한 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너무나도 답답하고 화가 났다.

환경이라는 건 개인이 변화시키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불변하는 하나의 전제가 된다.


그리고 내 후기에는 자꾸 사고를 치는 안진모에 대한 쌍욕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이건 같은 누나 입장에서 너무 화가 나서...

물론 우리 동생은 진모에 비하면 천사지.


내가 소설을 읽자마자 썼던 후기의 마무리는 이렇다.


진진이가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어떤 선택이든 분명 후회는 뒤따를 것이다.

그게 바로 삶의 모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보통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미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고민한다.

내가 유일하게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앞으로를 결정하는 일뿐이니까.

과거를 곱씹는 건 퇴보하는 일이다.


그러니,

과거를 돌아보기보다는

현재를 보듬고

미래를 선택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더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삶의 모순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1mm의 진일보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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