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SF를 그리 선호하지 않는다.
우주처럼 방대한 것에 쉽게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SF를 타이틀 장르로 내건 이 책은 꽤 오랫동안 읽기를 미뤄왔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 약간의 후회가 밀려왔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읽었지!'
우주나 행성 같은 방대한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닌, 로봇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도 우리의 일상과 아주 밀접한 이야기.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관계'가 아닐까? SF를 굳이 강조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천 개의 파랑> 또한 서울예술단에서 뮤지컬을 제작하여 몇 번 공연이 올라왔었는데, 안타깝게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보고 온 사람들의 평이 썩 좋지 못했던 것을 보면 오히려 좋은 건가? 싶기도 하고.
그렇지만 원작을 다 읽고 나니 극으로 어떻게 표현했을지 궁금해지긴 했다.
옆에 있는 당신이 행복하면 저도 행복해져요. 저를 행복하게 하고 싶으시다면 당신이 행복해지면 돼요. 괜찮지 않나요?
- 천 개의 파랑
이 구절은 나의 심금을 울렸다.
나의 가치관과 꼭 맞는 이야기.
나는 생각보다 타인으로 인해 긍정적인 감정을 많이 느끼게 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변인의 감정에 잘 동화되는 편이다.
매사 긍정적이고 환한 사람이 있으면 나도 덩달아 기뻐하고, 매사 부정적이고 짜증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그런 나에 대한 사용설명서 같은 구절.
마음에 들었다.
슬픔도 배출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 있었는데 놓쳤다. 현실의 무게감이 몸을 눌러 아무것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것은 몸속에서 흐르지도, 버릴 수도 없는 물로 오래도록 고여 있었다. 비린 냄새가 났다.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일 때도 속에 쌓인 슬픔이 찰랑거리며 비린내를 풍겼다. 슬픔이 비림으로 바뀌자 후에는 꺼내려고 해도 비릿해서 꺼낼 수 없어졌다. 그렇게 계속 몸에 담아두었다. 고여서 비려질 때까지. 끝끝내 썩어 마를 날을 기다리면서.
- 천 개의 파랑
해소되지 않는 감정이라는 것은 무섭다.
과거에 이미 꽉 닫혀버린, 그래서 어떻게 해도 빼낼 수 없는 무언가이다.
그 깊은 골의 감정은 어떻게 뱉어내야 하는가?
현재를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큰 고민이다.
내 생각에, 썩어 마를 날이라는 것은 오지 않는다.
영원히 마음 한 구석에 고인 채로 썩은내를 풍길 것이다.
덮어보아도, 가려보아도 차마 썩은내는 감춰지지 않을 것이다.
내 스스로 뱉어내야 한다.
그 어느 시인이 기침을 해서 뱉어낸 가래처럼.
나도 언젠간 모두 게워낼 수 있을까.
이 책도 읽은 지 꽤 시간이 흘렀다.
당시 적어둔 후기를 첨부해본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았기에) 각자의 평행선을 향해 걸어가던 보경, 은혜, 연재의 모습이 우리 가족 같기도 했다.
대화가 없는 가족은 평생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로봇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하게 생명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 같다. 로봇의 생명은 영원일텐데도 불구하고...동물에 대해 깊게 다룬것이 좋았다.
콜리가 간접적으로 타인을 통해 행복을 느끼듯 행복이라는 것은 혼자 자아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타인이 있어야만, 타인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말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너무나도 적절한 말일 것이다.
행복은 전염된다.
불행은 감염된다.
타인에게는 좋은 것만 건네주자.
모든 것은 내게 또 다시 돌아올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