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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ha Jan 18. 2023

딸에 대하여


 모처럼 편안한 휴일을 보내고, 잠자리에 들기  손톱 정리를 하며 흥얼거리고 있던 , 갑자기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평소 늦은 밤에 전화가  울리지 않는데 누구의 전화일까, 괜히 설레며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아빠였다.


“밤늦게 무슨 일이야?”


'너네 엄마랑 못살겠다.'  


당황보단 한숨이 먼저 나왔다. ‘한동안  지내다가 ... ‘ 삼십  넘게 부모님 집에 붙어살면서, 연례행사처럼 발생하는 마찰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런 갈등 , 딸인 나의 역할은 너무나 명확해서인지 아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득해졌다.


'감정 쓰레기통'


 평소에도 엄마, 아빠를 보면 '저렇게 맨날 보면서도  말이 끊이지 않을까'싶을 정도로 꽁냥꽁냥 지내다가도, 한번 싸우면  감정을  쏟아낸다. 두 분  평소의 서운함을 꾹꾹 누르고 누르다 폭발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릴  크게만 느껴졌던 어른들의 이런 유치한 싸움은 사실 나이가 들어도   없다는 씁쓸함만 느끼게 한다.  


 불과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싸우면 어떻게든 내가 나서서 풀어줘야 한다는 책임감이 막중했다. 이상한 사명감 같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다. 모든 일에 무던한 오빠는  분의 문제는 알아서 해결해야 하고 늘 그렇게 했다면서 크게 개의치 않아 하지만, 반대로 예민한 나는 그런 상황들을 좀처럼 견뎌내지 못한다. 따로 만나 이야기도 나눠보고(그래봤자 밤에 결국  집에서 모이는데...) 친구들의 경험담도 들어보고,  그러다가 막막함에 서러움이 사무치는 밤이 되면 파워 f감성에 젖어 훌쩍대기도 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나라를 구하는 잔다르크의 심정으로 어떻게든 극적인 화해를 이뤄야만 했다. 늘 결말은 해피엔딩이었지만, 나는 잔다르크도 아니었고,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비둘기도 아니었다. 두 분의 화해엔 내 지분이 전혀 없다. 단지 두 분이 함께 지낸 세월 속에서 굳혀진 믿음과, 흐르는 시간에 맞춰 조절되는 감정선 덕이다.


 그렇게 성인이   어느 순간부터 둘의 싸움에 모호하게 껴버린 나는, 싸움이 생길 때마다 감정의 쓰레기통을 들고 다니며 쏟아지는 것들을 받기 급급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감정을 받아주는 역할에 익숙했던 나는 부모님과의 관계에서도  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내가 독립을  후로 여느 때보다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내가 없으니 둘이  사이가 좋아졌네'라며 웃으며 넘기곤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참사가  당혹스러웠다. 어떤 특정 단어로 정의 내릴 수 없는 복잡한 부부의 세계는, 일단 내가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건지 참 어렵다.  마치 여름 막바지에 찾아오는 태풍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가  생채기를 내고 사라진다. 며칠 간의 복구 작업이 진행되면 언제 그랬냐는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도 비슷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처럼 내 마음 곳곳에도 흉터들이 남아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어른이 되어가는 속도에 가속이 붙고 있음을 실감하고 있는데, 되려 부모님이 아이가 되어가는 속도는 훨씬 빠르다. 추월당하는 순간 이젠 의지해도 될만한 딸이 되어버렸다. 좋든 싫든 나의 숙명이다.      시간 동안 휴대전화를 붙잡고 나에게 징징거리며 하소연을 하는 모습을 보면, 오죽했으면 딸한테까지 민낯을 다 보여주나 싶어 안쓰럽다가도 언제까지 이런 감정의 찌꺼기들을  받아줘야 하나 싶어 막막하기도 하다.

 

 어제도 일하는 시간을 잘게 쪼개, 인당 한 시간 개별면담을 진행했다. '힘들었겠네, 마음 아팠겠네..'라며 어르고 달래다가도 ' 그럴 거면 , 이혼할 거야?'라며 버럭 했다가, 같이 울컥했다  에너지를 쏟아냈더니 기진맥진한 상태로 침대에 누웠다. 딸은 도대체 부모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는 어떤 딸일까?


 오늘 아침 일찍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상황이 호전됨을 단번에 알아챌  있었다. 다음  이맘쯤이면 언제 싸웠냐는   둘이 테라스에 나란히 앉아 커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겠지.  똑같은 레퍼토리라 결말을 안다는 게 다행이다가도 씁쓸하다. 결혼하지 않은 딸의 숙명.  숙명을 받아들이는 나는 참으로 효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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