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순간들이 표면이 되는 방식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작업을 오래 하다 보면
시간이 분명히 남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시계로 잴 수 있는 시간이 아니라,
멈춤과 반복, 망설임과 재개의 흔적으로
표면 위에 고여 있는 시간이다.
나는 그 시간을
지우지 않고 쌓아두는 방식으로 작업해 왔다.
작품 위의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앞으로 나아가다 되돌아오고,
겹쳐지고, 멈췄다가 다시 이어진다.
어떤 선은
이전에 그었던 선을 따라가고,
어떤 색은
이미 지나간 감정 위에 다시 놓인다.
이 반복 속에서
시간은 단순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층을 이루며 남는다.
작업은 언제나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지만,
그 선택은
이미 지나간 시간들과 함께 작동한다.
빠르게 그린 화면과
오래 머문 화면은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전혀 다른 밀도를 가진다.
오래 머문 시간에는
결정하지 못한 순간들이 스며 있고,
쉽게 지나치지 못한 감정들이 눌려 있다.
그 눌림은
색의 두께가 되고,
선의 무게가 되며,
화면의 호흡을 만든다.
시간은
작품에 이야기를 더하지 않는다.
대신
표면의 감각을 바꾼다.
나는 작업에서
완전히 지워버리지 않는다.
지우려다 멈춘 자국,
덮여 있지만 여전히 드러나는 흔적,
의도적으로 남겨둔 실패의 자리들.
그것들은
정리되지 않은 과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작업이 지나온 시간을 증언하는 표식이다.
완벽하게 매끈한 표면보다
조금 울퉁불퉁한 표면이
더 많은 시간을 품고 있다.
시간은
지워질수록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남겨질수록 축적된다.
처음에는 의도했던 방향이
시간이 쌓이며 달라지기도 한다.
반복하다 보니
다른 흐름이 보이고,
기다리다 보니
다른 선택이 가능해진다.
시간은
작업의 결과를 미루고,
성급한 결론을 늦춘다.
그 지연 덕분에
화면은
자기만의 속도를 갖게 된다.
나는 그 속도를
억지로 앞당기지 않으려 한다.
작품은 특정 시점을 기록한 결과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시간이 머물렀던 방식,
지나가며 남긴 태도의 집합에 가깝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어디에서 멈추었는지—
그 모든 것이
표면 위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작품을 볼 때
형태보다
시간의 감각을 먼저 느낀다.
돌아보면
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왔다기보다
시간을 쌓아왔다.
망설였던 시간,
멈추어 있었던 순간,
다시 시작했던 용기—
그 모든 것이
선과 색, 여백과 겹침의 형태로
화면 위에 남았다.
시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어떻게 머물렀는가에 따라
작품의 결을 바꾼다.
나는 그 시간을
서두르지 않고,
지우지 않고,
하나의 층으로 받아들인다.
작가메모.
작품은 시간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시간이 머물다 간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