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창문, 80km의 명상

이동중인 초상화

by 서히


지하철 창문에 내 얼굴이 비친다.
검은 터널을 지날 때만 잠시 나타나는,
어둠이 빌려준 일시적인 초상이다.

밖의 풍경 위로 내 형태가 겹쳐진다.
그러나 창문은
안과 밖을 구분하려 애쓰지 않는다.
나무와 건물, 그리고 나의 뺨을
한 장의 유리에 아무렇게나 섞어버릴 뿐이다.


손끝에 닿는 유리는 차갑고 단단하다.
이 얇은 투명함 하나가
시속 팔십 킬로미터의 바람과
나의 고독 사이를
간신히 가로막고 있다.

터널의 소음이 유리를 잘게 흔들 때마다
비친 내 얼굴도 함께 미세하게 떨린다.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보지 않는다.
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하려 들지도,
어떤 이름을 붙이지도 않는다.


열차는 멈추지 않고 다음 역으로 향한다.
어느 순간 터널이 끝나 빛이 쏟아지면,
어둠이 빌려준 나는 연기처럼 고요히 증발한다.

이제 창문에는 이름 모를 동네의 지붕들만 남아 있다.
내가 잠시 그곳에 있었다는
흔적조차 없이.

지금은 그저 이동 중이라는 사실만이
다시 선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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