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기간이 지난 문장

by 서히


벽 한쪽에 안내문이 붙어 있다.
비를 여러 번 맞으며 스스로를 씻어낸 종이는
마른 뒤에도 빳빳해지지 못하고
파도처럼 굽이진 채 굳어버렸다.

한때는 단호하게
무언가를 선언했을 문장들이
이제는 수채화처럼 서로의 몸을 섞고 있다.
글자들은 형태를 유지하려 애쓰지만,
그것들이 모여 만들던 의미는
빗물을 타고 이미 바닥으로 흘러간 상태다.


사람들은 그 앞을 무심히 지나친다.
안내하지 못하는 안내문에
눈길을 줄 만큼
세상의 시간은 넉넉하지 않다.

안내문은 여전히 벽에 붙어 있지만,
자신이 더 이상
누군가의 이정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번진 얼굴로 받아들이고 있다.

제거되지 않았다는 사소한 우연 덕분에
그는 존재를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벽에서 떨어지지 못한 종이의 고집이라기보다,
잊힌 존재를 떼어낼 손길조차
도달하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


나는 잠시 서서
그 흐릿한 흔적을 바라본다.
거기에 어떤 약속이나 금지가
적혀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소임을 다한 사물이
비어 있는 채로 여전히 거기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무도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조용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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