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이 남긴 것들

- 선 이후의 감각

by 서히

선을 여러 번 지나치고 나면
화면에는 더 이상 하나의 선만 남지 않는다.
겹쳐진 흔적들, 지워지지 않고 남은 방향,
의도하지 않았으나 끝내 사라지지 않은 움직임들.
그 모든 것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한 자리에 머문다.

나는 그것을 완성된 결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촘촘히 쌓인 상태에 가깝다고 느낀다.
선들이 멈추고 나서야 비로소 생겨나는 자리가 바로 면이다.

면은 처음부터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선을 긋고, 멈추고,
다시 같은 자리에 서는 그 반복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면을 억지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선을 더 정리하거나
형태를 완성하려 하기보다,
이미 남아 있는 흔적들이
어떤 밀도로 머물고 있는지를 가만히 살핀다.


면에는 찰나의 감정이 아니라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지나간 선택들, 숱한 망설임, 멈춤의 흔적들이
한꺼번에 겹쳐져 깊이를 만든다.

가끔은 그 면이 너무 조용해 보여

무언가를 더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잠시 미룬다.
면이 아직 스스로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면은 많이 그린 결과가 아니라
그리지 않기로 한 선택들 덕분에 태어난다.
더 나아가지 않고 멈춘 자리,
지우지 않고 남겨둔 흔적들이 모여 비로소 면이 된다.

오늘도 화면 앞에서 나는 잠시 물러섰다.
선을 더 긋는 대신, 이미 남아 있는 것들이
어디까지 말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인다.


면이 남긴 것은 형태라기보다 감각에 가깝다.
손에 오래 머무는 무게,
눈에 즉각 보이지 않는 밀도.

그 감각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곁에 있다면,
오늘의 작업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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