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은 감정이 머무른 흔적이다

색과 밀도의 시간

by 서히

면은 감정이 머무른 흔적이다.
그 감정은 방금 생겨난 찰나의 것이 아니다.
여러 번 지나온 시간 속에서 서서히 가라앉아
앙금처럼 남은 상태에 가깝다.

선을 긋고,
멈추고,
다시 같은 자리에 서는 동안
감정은 곧바로 휘발되지 않는다.
말로 정리되지 않은 채 화면 어딘가에 스며들어
저마다 다른 밀도로 차곡차곡 쌓인다.


나는 작업을 하며 감정을 억지로 꺼내 놓으려 하지 않는다.
지금 느끼는 바를 즉시 설명하거나
특정 형태로 고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 감정이 어디까지 흐르다
어느 지점에 머물고 있는지를 가만히 살필 뿐이다.

색을 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내게 색은 감정을 드러내는 수단이라기보다
감정이 머물 수 있는 조건에 가깝다.

어떤 색은 감정을 밖으로 밀어내고,
어떤 색은 안으로 조용히 눌러앉힌다.

그래서 나는 색을 더하기 전에 자주 망설인다.
지금 이 화면에 감정이 더 필요해서인지,
아니면 이미 머물고 있는 감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면이 충분히 생겼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대개 화면이 아주 고요해진 뒤다.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더 이상 손이 쉽게 움직이지 않는 상태.
그 멈춤 속에서 나는 감정이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면은 감정을 정리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정리하지 않은 채 남겨둔 시간의 흔적이다.
쉽게 말하지 않고,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으려는 태도가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자리.

오늘의 화면에도 특별한 장면은 없다.
다만 어떤 감정이 여전히 이곳에 머물고 있다는 감각만 남아 있다.

그 감각을 서둘러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는 것.
지금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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