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때문에 상사와 결혼하라고?

스위스에서 만난 또 하나의 가족

by 이서후

“난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어, Ju. 근데 날씬해지고 싶단 말이야. 어떡하지?”


YV 투자 회사의 점심시간. 내 옆에 앉은 릴카가 근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직원들은 모두 둥글게 모여 앉아서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내 한쪽 옆에는 릴카가, 다른 옆에는 로날도라는 친구가 앉아 있었다. 릴카는 다이어트 중이라며 샐러드가 담긴 접시를 내게 보여주며 한숨을 쉬었다. “Ju, 넌 좋겠다. 나도 너처럼 조금만 먹고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허허, 이 친구가 아직 나를 잘 모르는군. 나는 웃으며 그녀에게 답했다. “나 사실 집에서 많이 먹어. 근데 회사에서는 왠지 긴장돼서 밥이 잘 안 들어가서 그런 거야.”


릴카는 웃으며 긴장할 필요 없다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로날도가 씩 웃으며 나에게 물었다. “너 전혀 긴장하는 것처럼 안 보이는데, Ju? 벌써 여기 온 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릴카랑 친해졌잖아. YV 회사의 최상위 포식자를 네 편으로 만들다니 대단해!” 그렇다. 사실 릴카는 이 곳에서 대단한 성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일단 불의를 잘 못 참는 성격인 데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별로 숨김없이 드러내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릴카에게 나는 진실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그러자 초반에 나를 경계하던 그녀는 곧 내가 나쁜 의도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게다가 알고 보니 내가 어벙하고, 사람을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걸 파악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성격을 희한하다고 할 때, 난 그녀의 독특함을 이해하고 존중하려 노력했다. 사무실에서 직접 만나며 우리는 더욱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다이어트 도와줄 거 아니면 말 걸지 마라, 응?” 릴카가 로날도를 흘겨보자, 로날도는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로날도야말로 진짜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는 주짓수와 복싱은 기본, 호신술의 대가라고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의 사부님 수준의 실력자라고 들었다.) 로날도의 추천으로 릴카도 복싱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았다고 했다. 운동을 하면 다이어트 효과도 있고 기분도 좋아진다는 말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릴카가 샐러드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Ju, 문제가 뭔지 알아? 운동을 하면 칼로리가 타잖아. 칼로리가 타면 더 배고파진다는 거야. 그럼 더 먹고 싶잖아. 이건 완전히 역효과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 그게 내가 바로 운동을 안 하는 이유야.” 우리는 킥킥거렸고, 로날도는 그때부터 호시탐탐 나를 놀릴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의 놀림은 우선 내 옷차림에서부터 시작됐다. YV의 다른 직원들도 그랬지만, 로날도는 특히 내가 무슨 옷을 입는지, 어떤 귀걸이를 하는지 등등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블랙진을 입고 나타나는 날에는 ‘오늘 콘셉트는 할리우드에서 커다란 강아지를 끌고 다니는 부르주아니?’라고 장난을 쳤다. 원피스를 입고 가는 날에는 ‘이야, 오늘 네가 입은 건 한국의 전통 춤 복장이니?’하며 또 놀렸다.


나는 치프에게 로날도가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치프는 그 반대인 것 같다며, 로날도가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는 거라고 했다. 그건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로날도가 나와 치프를 동시에 놀리는 것을 가장 즐거워한다는 것이었다.


치프와 내가 학생 비자 문제를 가지고 골머리를 썩일 때였다. 주 당 15시간씩 일하는 학생비자를 받아내기 위해 필요한 서류가 많았기 때문이다.


“Ju가 스위스 사람이었으면 편했을 텐데.” 치프가 중얼거리자, 로날도가 이렇게 말했다. “Ju가 비자를 받는 쉬운 방법이 또 있어요. 스위스 사람하고 결혼하거나, 스위스에서 사업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거죠. 치프도 싱글이고 Ju도 싱글이니, 둘이 결혼하면 되겠네. 딱이다. 운명인데?”


치프는 정색하며 로날도를 쳐다봤고, 나는 어찌할 줄 몰랐다. 여기서 싫다고 외치면 치프가 더 무안해질 것 같고, 가만있자니 로날도의 말에 동의하는 것 같으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로날도! 불쌍한 Ju 좀 그냥 내버려 둬!” 보다 못한 브리나가 말했다. 그러자 나의 구세주인 릴카도 이렇게 거들었다. “안돼! Ju는 나랑 결혼할 거라고, 호호.” 그녀는 로날도에게 아무도 Ju를 넘보지 못한다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자 로날도는 씩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너는 스위스 사람이 아니잖아, 릴카. 게다가 사업체 운영자도 아니고. 그럼 Ju가 비자를 못 받는다니까.” 그러자 릴카가 그에게 말했다. “그럼 네가 Ju랑 결혼하던지! 넌 스위스 사람이잖아.” 로날도가 껄껄 웃으며 안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오, 좋은 제안이지만 안타깝게 됐는걸? 나는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 너도 알잖아 릴카? 나에겐 이미 4년간 함께 한 여자 친구가 있어.” 결국 나는 그들에게 외쳤다. “저기요, 여러분. 내 의견도 좀 존중해 줄래? 난 아직 아무랑도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그래, 이 인간들아. 이제 Ju 좀 그만 놀려먹어. 얼른 일 안 해?” 치프가 한소리를 하자, 로날도가 빙긋 웃으며 되받아쳤다. “어, 치프. 오해가 있었나 봐요. 저는 Ju 말고 치프 놀린 건데, 하하.” 로날도와 치프는 엄청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서로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았다. 아무튼 그들 사이에 둘러싸여, 비자를 받기도 전에 멘탈이 탈탈 털리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열심히(?) 일하며 하루를 마친 후, YV의 사람들은 임팩트 허브에서 맥주 한잔씩을 하며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코로나 걱정 없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고, 북적거리는 분위기를 즐길 수 있었으니. 릴카는 주로 저녁 약속이 있어서 참여하지 않았으나, 로날도와 다른 직원들은 나에게 술 한잔씩 사 주겠다며 함께 가기를 권했다. 드디어 나의 오랜 로망, ‘퇴근 후 직장 동료들과 웃으며 맥주 한잔’이 이루어진 것이다.


치프와 그의 친구들, 로날도와 그의 친구들, YV의 다른 직원들과 임팩트 허브의 사람들, 릴카의 룸메이트인 맨디 등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치프는 고맙게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 업무 능력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 모습을 보고, 로날도가 나에게 맥주 한잔을 사주며 말했다. “사실 네가 한국에서 원거리로 일할 때, 너에 대한 소문을 되게 많이 들었거든. 일을 엄청 잘한다는 거야! 그래서 되게 궁금했어. 어떤 친군지.”


몇 마디 더 주고받으며, 로날도와 나는 금세 친해졌다. 그런데 내 잔에 있는 맥주가 줄지 않자, 로날도가 나보고 술을 못하냐고 물었다. 사실 그랬다. 나는 맥주에 대한 로망만 가지고 있었을 뿐, 술은 잘 못했던 것이다. 내가 한 모금을 마시고 얼굴을 크-하며 찡그리자 로날도와 주변 사람들이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우와, Ju! 한국은 음주문화로 꽤 유명한 나라 아니야? 너 한국 사람 맞아?”


곧 나는 임팩트 허브에서 ‘술 못 마시는 한국인’으로 유명해졌다. 그리고 내 맥주는 결국 로날도와 치프가 나눠마셨다. 한창 재밌는 분위기가 달아오르는데, 로날도가 내 귀걸이를 보며 예쁘다고 했다. 그래서 그에게 그걸 빌려주고 인증샷까지 찍었다. (사실 나는 귀를 뚫지 않아서 귀찌를 하고 있었다. 귀찌를 본 스위스 친구들은 한국식 신문물이라고 생각하며 엄청 신기해했다.)


내 귀찌를 하고 요염한 척하는 로날도. 자기 집까지 하고 가겠다는 걸 내가 말렸다.


로날도가 내 귀걸이를 하며 물었다. “나 예뻐?” 그가 요염한 척 입술을 내밀자 모두들 박장대소했다. 안 예쁘다고 하면 삐질 기세여서, 예쁘다고 해 줬다. 한참 그렇게 웃으며 수다를 떨다가 릴카의 룸메이트인 맨디가 내게 넌지시 말했다. “내 느낌엔 사람들이 요즘 너 때문에 임팩트 허브를 더 자주 오는 것 같아, Ju! 진짜 분위기가 달라졌다니까.”


정말? 나같이 사람 만나기를 무서워하는 쫄보가? 문득 내 주변을 다시 둘러보니, 맨디의 말처럼 어느새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잘 적응하여 웃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신기했다. 스위스에서 항상 혼자라고 느꼈는데. 생각해보니, 해외 생활을 하며 이렇게 마음 편하게 웃어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다. 그래, 살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는구나. 그동안 아주 헛 산건 아닌 거야. 이제야 비로소 행복한 스위스 생활이 내 앞에 펼쳐질 것만 같은, 그런 벅찬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그렇게 가족 같은 끈끈한 정서로 뭉쳐서 전혀 흔들릴 것 같지 않던 YV 회사의 직원들 중, 아주 중요한 인물이 갑작스럽게 작별을 고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사람은 바로 내 직접적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분인, 사수님 재키였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이미 회사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있었음을. 그녀가 떠나버렸다는 소식은 당연히 나에게도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다음 글에서는 별안간에 사수 없이 남겨진 내가, 어떻게 디자이너로서 꿋꿋하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보도록 하겠다. (아,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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