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 어떻게 생각해? 이게 우리 새로운 브랜딩이야!”
치프가 나에게 물었다. 저 옆에 앉아있던 대빵 치프도 괜히 궁금한지 내 표정을 살폈다. 벽에는 여러 개의 이미지가 빽빽하게 붙어있었다. 새로운 로고, 웜톤의 색상 팔레트,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웹사이트와 디자인 요소 등을 싹 다 갈아치운 브랜딩…. 내가 알던 YV의 이미지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마침 회사 주방에서 커피를 가져오던 릴카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거의 신분 세탁 수준 아니니, Ju? 저거 만드느라고 YV에서 돈을 꽤나 썼다고.” 난 괜히 내 표정을 살피는 그녀를 보고 답했다. “그랬구나. 다행히 비용을 들인 보람이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을 듣고 치프와 대빵 치프가 ‘그렇지?’하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내심 걱정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입사 이래) 지금까지 한 작업을 하나도 쓸 수 없게 되었으니, 혹시 속상해하지 않을까 하고. 물론 조금 아쉬운 감은 있었지만, 솔직히 별로 속상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던 거고, 지금은 이게 최선일 테니까. 상황마다 최선은 늘 변한다. 나는 YV에서 일하며 그 사실에 적응하는 법을 배운 지 이미 오래였다.
“걱정 마세요. 늘 그렇듯이, YV에게 최선인 일이 제게도 최선이니까요.” 내가 치프와 대빵 치프에게 말하자 로날도가 이렇게 맞받아쳤다. “역시 넌 사랑받는 법을 아는구나, Ju. 이러니까 다들 너를 좋다고 하지. 물론 네가 옷을 잘 입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오늘은 또 무슨 콘셉트니? 빨간색을 입은 걸 보니까 혹시 주제가 ‘꺼지지 않는 열정’ 이니?”
으이고, 못 말리는 로날도. 아무튼 완성된 브랜딩을 보니, 이제 웹 디자인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동안 외부 UI 디자이너가 대충 해 놓고 사라진 디자인을 손대느라고 바빴는데, 이제 전혀 다른 브랜딩으로 이루어진 웹사이트가 떡하니 완성되었으니까. 실제로 새로운 브랜딩 이후 가장 먼저 온 일은 마케팅 쪽에서 요청한 그래픽 디자인 업무였다.
마케팅 팀에는 나와 자주 소통했던 브리나 말고도, 샐리(Celly)라는 직원이 있었다. 샐리는 YV의 직원들과 사적으로 어울리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퇴근 후에 맥주 한잔씩 하러 임팩트 허브에 오는 일도 없었으며, 늘 오후 다섯 시가 되면 땡! 하고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다만 그녀가 명품을 좋아하고, 취리히 호수 주변의 골든 코스트 (우리나라로 치면 한강 주변)에 있는 집을 사려고 애쓴다는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샐리는 나에게 마케팅 팀에서 운영하는 YV의 블로그 섹션에 들어갈 메인 이미지들을 요청했다. 그들이 주로 하던 방법대로, 무료 이미지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서 좀 편집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프로젝트가 마음에 안 든다. 브리나와는 달리, 샐리는 늘 나에게 단순 노동을 시키고 싶어 했다. (나에게 창의적인 일을 주라는 치프의 의견과는 다르게도.) 그리고 샐리의 성격상, 내가 무료 이미지를 찾아온다고 해도 몇 번 반려할 것이 분명했다. 릴카와 나는 가끔 그런 가설을 세우고는 했다. 샐리가 은근히 디자이너를 무시하면서 괴롭히는 걸 즐기는 것은 아닌지. 이전에도 샐리와 일하던 마케팅 전담 외부 프리랜서가 그만둔 적이 있었는데, 그녀와는 일을 못하겠다며 나갔기 때문이다.
둘째, 샐리가 준 프로젝트는 새로운 브랜딩과 거리가 멀다. YV의 블로그 섹션도 웹사이트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므로, 우리의 새 브랜딩에 맞는 이미지가 필요했다. 새롭게 단장한 웹사이트에 값싸 보이는 무료 이미지를 막 내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마치 갓 뽑은 새 차에, 장식이랍시고 마트 전단지를 붙이는 것과 같았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나는 예전에 대빵 치프에게도 침착하게 목소리를 내 본 적이 있었다. 샐리에게도 한번 도전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작전을 좀 치밀하게 짜야했다. 다행히 나는 학교에서 팀 프로젝트의 악몽에서 벗어나서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기에, YV에 쓸 시간이 좀 더 있었다. 즉, 무료 이미지를 찾아서 건네주는 것보다 좀 더 창조적인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를 어떻게 변모시키면 좋을까?
우선 그동안 생존 필살기로 체득한 ‘보고서 작성 스킬’에 시동을 걸었다. 일목요연한 브리핑은 언제나 프로젝트 아이디어를 어필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YV의 새로운 브랜딩에 대한 분석, 비슷한 타 회사들의 블로그 포스트 이미지들에 대한 짧은 리서치, 그리고 내가 만들 수 있는 스타일을 첨부해서 1-2페이지짜리 브리핑 자료를 만들었다.
물론, 보고서는 절대 샐리에게만 주지 않았다. 브리나와 샐리, 그리고 마케팅 팀과 긴밀히 일하는 대빵 치프에게도 함께 공유했다. 대빵 치프는 새로운 브랜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태도를 마음에 들어했고, 브리나는 고맙게도 내 디자인 아이디어에 하트를 보내 주었다. 결국 며칠 후 샐리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좋았어!” 내가 추진하고 싶은 대로 일을 주도했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 이게 얼마 만에 되찾은 주권(?)인가. 직장뿐 아니라 학교에서도 그랬다. 꿋꿋하게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오히려 그 모습에 박수를 보내는 친구들 몇이 생기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조금 덜 무시하는 듯했다.) 덕분에 별다른 괴롭힘 없이, 비로소 직장 일과 학교 일에 균형을 조금씩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YV의 블로그에는 내가 콜라주 기법을 사용하여 제작한 이미지들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스타일은 회사의 웹사이트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에도 사용되며 직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재밌는 소동도 벌어졌는데, 이후 경쟁 업체였던 ’S’ 투자 회사에서도 비슷한 콜라주 형식으로 자기네 광고 이미지를 바꾸었던 것이었다. 그걸 발견한 릴카가 나에게 이렇게 일렀다. “이것 봐, Ju! 얘네들이 네 스타일을 베끼고 있어! 이런 도둑놈들! 단죄하자!”
YV의 새로운 브랜딩에 맞추어 작업했던 콜라주 이미지들 중 일부의 모습
치프는 소송을 걸어야 한다는 릴카를 달래며, 나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고 전했다. 드디어 새로운 사수님을 뽑았다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레비’라고 하는 사람의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공유해 주었다. UX 전문 디자이너인데, 스위스의 전자 잡지사인 ‘W’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흥미롭게 그녀의 이력을 보던 중 깜짝 놀랐다. ‘어라, 나랑 고작 두 살밖에 차이가 안 나잖아? 어떻게 이 나이에 벌써?’ 스위스 사람이었던 그녀는 UX 디자인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는 대신 실무의 길을 선택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이력을 보는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약 나도 한국에 계속 있었다면 지금쯤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만약 대학교 2학년 때 스위스로 유학 오지 않았다면. 스위스에서 아파서 휴학하지 않았다면.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 편입하지 않고,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면. 지금쯤 나도 아마 그녀처럼 실무 전선에서 좀 더 자리를 잡고 있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머나먼 길을 돌아온 듯한 느낌에, 갑자기 십 년은 부쩍 늙은 것 같았다. 유리 멘탈이 또 파스스-부서져 내리며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어쩌겠나. 나는 나의 길이 있겠지. 부디 새로운 사수님이 나를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얼마 후, 드디어 그녀와 나는 떨리는 첫 만남을 가졌다. 나와 두 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사수님, 레비. 그녀와 나는 과연 어떤 케미를 만들어 갔을까?
다음 글에서는 레비가 YV에 적응하도록 도우며 있었던 에피소드와, 그녀와 함께했던 특별한 일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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