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 많은 신입이 내 상사라고?

나를 경계하는 그녀와 가장 먼저 한 일

by 이서후

“여러분, 우리 새로운 UX 디자이너가 될 레비를 소개하지! 포트폴리오는 다들 미리 봐서 알지?”


치프는 마치 전학생을 소개하는 선생님 같았다. 그의 옆에서 키 큰 언니 한 명이 멋쩍은 듯 팀원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보다 두 살 많은 레비. 그녀는 나의 사수님이 되실 분이었는데, 예전에 있던 재키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사람이었다. 이 젊은 언니는 몸 곳곳에 아기자기한 문신이 많았고, 반지도 많이 끼고 있었다. 그리고 일단 나를 보고 놀란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다. 웬 예상하지 못한 동양인이 한 명 앉아있으니.


‘저 사람은 누구지?’ 하고 나를 쳐다보는 레비에게 치프가 말했다. “아, 저쪽은 Ju야. 우리 디자이너지. 벌써 우리랑 일한 지 2년이 넘었어!” 그러자 레비는 헷갈려 보였다. “…디자이너요?” 치프는 내가 그녀를 도와서 YV의 디자인 일을 할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디자이너가 한 명 더 있었는지 몰랐던 모양이었던 레비는 주춤거리며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나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이후, 오후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곧 사무실을 떠났다. 나는 곧 직감했다. 레비가 어떤 성격인지!


“하아…. 문신, 피어싱, 올 블랙 착장, 적은 말수, 경계 어린 표정. 딱 답 나오네. 엄청 소녀 감성이신 여리신 분이구나.” 내가 중얼거리자 릴카가 응? 하는 얼굴로 쳐다봤다. 물론 역설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나의 직감은 분명 그랬다. “레비는 수줍음이 많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눈빛을 보면 알 수 있거든!” 내가 확고한 표정으로 말하자, 또 어디선가 나타난 로날도가 그럼 자기 눈빛은 어떠냐고 내게 물었다. 그러자 릴카가 그냥 나를 끌고 다른 데로 가버렸다. (그날 이후, 로날도는 나를 볼 때마다 눈을 부릅떴다.)

아무튼 예상대로 레비는 꽤나 내성적인 (하지만 조용히 불타오르는 열정을 가진) 언니였다. 주로 학교에 있어야 했던 나는, 일단 사무실에서 그녀를 볼 기회가 있으면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그리고 짧은 미팅을 요청했다. 레비가 YV에서 진행 중인 디자인 업무에 잘 적응하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물론 순전한 호의도 있었지만, 이제부터 얼굴을 자주 볼 레비와의 관계를 잘 맺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수님이 또 떠나게 된다면…. 아아, 그런 고통의 시간을 다시 마주할 수는 없었다.


레비는 좀 긴장한 얼굴로 미팅 룸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업무 방식과 내용들을 브리핑하며 분위기는 점차 부드러워졌다. 이후 내가 스위스에 와서 겪은 기구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레비는 꽤나 관심 있는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특히 스위스 대학에서 힘든 점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까, 그녀는 크게 공감하며 함께 자신의 경험담을 나누기까지 했다.


다행히 미팅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늘 단답형으로 답하던 그녀가, 미팅 막바지에는 나에게 문장으로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Ju, 넌 되게 용감한 사람 같아. 그렇게 먼 나라에서 여길 오다니…. 업무도 도와줘서 고마워. 사실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좀 난감했는데, 이렇게 적극적으로 도와주니까 알겠다. 사실 치프가 디테일한 업무 같은 건 너한테 물어보라고 했거든. 근데 초면에 막 물어보기가 좀 그렇더라고.”


이런 수줍은 언니 같으니라고! 고런 것은 언제나 나에게 물어보심 된다고요~. 미팅 이후 나에 대한 경계가 풀린 레비는 그때부터 다른 표정으로 나를 보기 시작했다. 우리가 하하호호 웃으면서 미팅 룸에서 나오자, 치프가 희한하게 쳐다봤다.


“뭐 재밌는 거 있니?”

치프의 물음에 레비가 말했다.

“Ju요!”


레비가 마음을 여는 모습을 보고, 릴카는 매우 흡족해했다. 일단 새로운 디자이너가 금세 떠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개발 팀에 있던 릴카는 디자이너가 새로 들어오는 것과 나가는 것에 엄청 예민했다.) 릴카는 레비와 큰 교류를 하지는 않았지만, 나와 레비가 잘 지내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말했다. 로날도와 브리나 등 다른 사람들도 모두들 레비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기에, 레비는 곧 나처럼 ‘YV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비공식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고맙게도 대학 생활의 고충을 잘 아는 레비는 나를 많이 배려해 주었다. 업무 양도 조절해 주고, 시간도 꽤 넉넉하게 잡아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레비가 나의 학장님 같이 많은 과제, 아니 업무를 지정해 주었다면…. 난 아마 학교나 일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어느 하루는 로날도와 그 친구 일리아가 취리히 호수로 보트를 타러 가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팀 전체에 보낸 공지였는데 웬일로 레비가 자기도 가겠다고 하길래, 나도 하루 저녁쯤은 시간을 내서 따라가 보기로 했다.


취리히 호수가 있는 벨뷰 근처는 걸어본 적이 있었지만, 여태껏 호수 자체에 보트를 타고 나가본 적은 없었던 나는 로날도에게 물었다. “근데, 우리 무슨 보트 타는 거야? 혹시 사람들이 발로 밀고 가는 그런 페달 보트?” 내가 직접 손으로 페달이 굴러가는 시늉까지 하며 말하자 로날도가 박장대소를 했다. “맙소사, Ju! 무슨 전근대적인 생각을 하는 거니. 우린 모터보트 탈 거라고, 하하.” 모터보트라니…. 왠지 위험할 것 같은데. 겁먹은 나의 얼굴을 보더니 로날도가 걱정 말라고 했다. 모터보트가 페달 보트보다 다리가 덜 아플 거라며.


결국 나와 레비, 로날도, 일리아와 다른 두 명의 사람들이 보트에 탑승했다. 나 빼고는 모두가 다 수영복 차림으로 갈아입었는데 솔직히 좀 민망했다. 그래서 일부러 시선을 저 먼 곳으로 던지며 이렇게 생각했다. ‘날이 풀리면 스위스 사람들은 이러고 노는구나.’ 릴카는 오리와 백조들이 실례하는 곳에서 수영하고 싶지 않다며 오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수영을 했다. 레비도 이제 사람들과 더 친해졌는지 함께 웃으며 놀았다.


사진 속 인물들은 허우적거리는 게 아니라, 신나게 놀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문득, 희한한 이질감이 들었다. 스위스에서 문화 차이를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여가 생활을 보니 정말 많이 다르기는 했다. 그들이 즐기는 스포츠와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가 다르고, 그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과 우리가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다르고, 그들이 가진 가치관과 우리가 가진 가치관이 다르고…. 아무리 좋은 친구들이 있다고 해도, 만약 이렇게 근본적으로 문화가 다른 곳에서 한참을 살아야 한다면 참 막막할 것이라는 느낌이 밀려 들어왔다.


그래도 재밌는 것은 스위스 사람들과 내가 서로의 문화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로망으로 가지고 있었던 퇴근 후 맥주 한 잔, 호수에서 백조에게 빵 부스러기 주기 등은 그들에게 일상이었다. 대신 그들은 한국 사람들 이야기를 하며, 내게 세상에서 가장 빠른 와이파이, 케이팝 문화와 뷰티 등을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했다. 결국, 각자 살고 있는 곳에 온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세계 공통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들이 신나게 모터보트를 타고, 수영을 하고, 워터 보드를 타는 것을 지켜보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뜨기 시작했다. 함께 피자집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에, 레비가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Ju, 모터보트는 처음이었다며? 넌 역시 오늘도 모험을 선택했구나. 나도 너처럼 어렸으면 좀 더 세상을 둘러보고 그랬을지도 몰라. 나는 벨기에로 잠깐 교환학생 갔던 것 빼고는 해외에 나가본 적이 없거든. 네 모험 정신이 부럽네. 나도 너처럼 살았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르잖아.”


하하, 이 언니 보소. 내가 어리다니. 나랑 두 살 차이밖에 안 나면서.


외국인으로 일하며 거의 내 또래인 신입 상사를 돕고, 문화 차이에 얻어맞으며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내 심정을 그녀가 알기는 할까.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남들보다 더 열심히 뛰면서 살아남고 있는 것인데…. 나는 레비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웃지요,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날의 작은 일일 여행 (어쩌면 반나절 여행)은 나와 레비를 좀 더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딱 보기에는 ‘시크 걸’ 같은 나의 새로운 사수님과 가장 처음 한 일이 낭만적이게도 보트 타기였다니,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어 나가도록 하겠다. 언제나 그렇듯, 스타트업에서 디자이너로 사는 것은 간이 열 두 개여도 모자란 일이니까.


보트 여행 이후 스트레스를 만빵으로 받아서 힘들었던 어느 날, 학교에 있던 나에게 치프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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