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졸업 준비 시즌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학생들과 교수님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폭등하는 가운데, 학장님의 공고문이 대문짝만하게 걸렸다.
“교수님들과 상의한 끝에, 졸업 준비를 위한 새로운 세미나와 과제들을 준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모든 학생들은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졸업 프로젝트를 할 권리 자체가 주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명심하세요. 참고로 이번 세미나는 3박 4일에 거쳐서 일어날 겁니다. 숲 속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열릴 것이니 다들 그곳으로 집합하세요.”
세미나에 참석하지 않으면 졸업을 못한다니. 이건 공고문인가, 경고문인가. 그리고 웬 게스트하우스? 아래에 첨부된 세미나의 커리큘럼을 쭉 훑어보던 중,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졸업 작품 전시라며 왜 마임 상황극을 한다는 거야….’ 희한한 커리큘럼에 다른 학생들도 눈살을 찌푸렸다. 다들 학장님의 독특함은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다른 과제들로 바빠 죽겠는데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냐고 수군거렸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우리 과 학생들은 이미 학장님이 맡고 계신 다른 프로젝트로 허우적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팀을 이루어서 해야 하는’ 그 프로젝트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실험 정신을 활용해 패션과 인터렉션 디자인을 접목하는 과목이었는데, 듣기보다 매우 난해했다. 아마도 아래의 사진을 보면 그 뜻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말미잘을 주제로 받은 우리 팀의 의상인데, 실리콘으로 만들어서 쭉쭉 늘어나는 망토(?)와 어깨 장식에서는 걸을 때마다 불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심지어 내가 모델이었다. 아아…. 나의 흑역사이니, 이하의 설명은 생략한다.
난생처음 써본 왕관이 말미잘 왕관이라니. 저 요염한 손목 장식은 또 어쩔 것인가. (다시 밀려들어오는 수치스러움과 고통)
예전 같았으면 팀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겠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사뭇 달랐다. 모든 팀원들이 과목 자체에 엄청난 고통을 받은 바람에 오히려 동병상련을 느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학장님이 주최한 그 과목 덕분에 반 학생들의 동지애가 좀 더 돈독해졌다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집단적 패닉 상황이 이루어져서, 스트레스의 총량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YV에서 쏟아지는 일과 말도 안 되는 학교 과제, 그리고 저놈의 세미나 준비까지 겹치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사실 일의 양이 많은 것보다도,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저 의상을 만드는데 든 실리콘과 패브릭의 비용을 우리가 다 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학장님은 특히 내가 속한 그룹에게만 좀 더 무리한 요구를 했기에, 팀원들 다들 그것을 불만으로 삼았다. 그들은 말은 못 했지만 괜히 나에게 눈치를 주었다. 학장님의 그러한 행동이 마치 내 탓인 것처럼.
그나마 나와 가까운 관계였던 클레아 (오랜만에 등장한, 함께 임팩트 허브의 ‘여름 기업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그 친구)가 이런 의심을 제기했다. “Ju,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들 학장님이 네가 있는 그룹을 더 갈구신다는 걸 알아. 그래서 너랑 같이 일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것도 있는 것 같아. 영어도 써야 하는 데다가, 노력 대비 학점도 안 나올 테고, 고생은 고생대로 해야 하니까. 네가 개인적으로 싫어서가 아니야. 단지 그런 일을 피하고 싶을 뿐이라고.”
클레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학교 생활이 힘들었던 건 단순히 학생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에게만 더 많은 과제를 주시고, 내가 한 일에만 더 꼼꼼한 체크를 하시며, 유독 나에게만 더 혹독한 점수를 주시던 우리 학장님. YV 투자 회사에 들어가기 위한 추천서도 써 주시지 않던 우리 학장님. 그분의 과목을 듣다가 화장실 가서 운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왜 나에게만 그러시는 것인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더 힘들었다.
결국 이번 프로젝트 때에도 학장님의 (조언을 포장한) 지시에 따라 우리 팀은 혹사당하고 있었다. 점점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왠지 나 때문에 그들까지 사서 고생하는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이를 악물고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작업을 마무리했다. 재봉틀 실과 실리콘 제조실을 오가며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치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Ju. 지금 어디야?”
“저요? 학교요.”
“아직도 학교에 있다고?”
“…네.”
“아, 그렇구나. 회사에서 좀 급한 일이 생겨서 혹시 와 줄 수 있나 했는데. 그럼 내일은 시간 되나? 금요일 오후 네다섯 시쯤.”
내일은 학장님의 세미나가 시작되는 날인데…. 취리히 도시에서 좀 떨어져 있는 숲 속 게스트하우스에서 시내 중심지에 있는 YV까지 가려면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치프에게 slack 등 메신저로 일을 보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치프는 됐다며, 내일 회사에 올 수 있는지 없는지만 알려 달라고 했다. 솔직히 너무 피곤해서 못 간다고 하고 싶었다. 학교 일 때문에 죽을 맛인데 굳이 회사까지 와서 일을 하라니…. 일단 상황을 봐서 내일 아침에 연락하겠다고 했다.
밤늦게까지 쓰잘데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프로젝트에 시달리고 집에 돌아와서, YV의 일을 하다가 그만 졸았다. 그러다 배가 꼬르륵거려서 깼다. 생각해 보니 저녁도 못 먹은 것이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일을 마무리하려는데 갑자기 슬퍼졌다. 엄청난 우울감이 엄습해 오려는 순간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정신 차리자. 이렇게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은 하루에 원래 열두 번도 넘게 드는 거니까, 이 순간을 잘 넘겨야 해.”
드디어 일을 마무리하고 자려고 하니, 피곤에 젖은 눈이 또 말똥말똥해졌다. 결국 불면증과 싸우는 것을 그만두고 내일 YV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에 대한 생각을 시작했다. YV를 생각하니 치프가 떠오르고, 치프가 나에게 해준 고마운 일들이 생각나고, 나의 사수님 레비가 혼자 끙끙거릴 생각에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YV에 처음 입사했을 때 들었던 마음가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일할 준비가 되어 있던 그 마음….
‘휴우…. 그래. 오죽 급한 일이면 치프가 전화를 다 했겠어. 내일 세미나에서 좀 일찍 나와서 YV로 가자. 초심을 잃지 말아야지.’ 결국 나는 YV로 가서 일을 돕기로 했고, 다음 날 아침 치프에게 가겠다고 전화했다. 기뻐하는 치프의 목소리 뒤로, 되도록 빨리 오라며 릴카가 외치는 것이 들렸다. 릴카가 저럴 정도면 뭔가 일이 있기는 한 것인데…. 고민 끝에, 나는 세미나 말미에 학장님의 눈을 피해서 게스트하우스를 몰래 빠져나와서 택시를 잡았다. 그런데 이런, 금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교통 체증이 심했다. 도착 예정 시간이 점점 늦어지자, 나의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가기로 약속한 때 보다 몇 분 늦어버린 나는, Limmatplatz 역에서 내려서 부리나케 사무실을 향해 달렸다. 헉헉거리며 벨을 누르자, 릴카가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아이고, 내가 좀 늦었지? 교통 체증이 심하더라고. 무슨 일인데 그래? 뭐 심각한 거야?” 내가 스카프를 푸르며 말하자, 릴카가 왠지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이리 와서 앉으라고 했다. 그녀는 사무실에서 가장 넓은 회의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회의실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와 있었다. 브리나, 레비, 로날도, 샐리, 치프도 있었다. 좀 긴장된 얼굴로 주춤거리며 그들 앞에 앉았는데, 사람들이 서로 눈치를 주고받더니 갑자기 한국말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분명 익숙한 멜로디였지만 난생처음 들어보는 가사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 생일 축하합니다~ 지구에서 우주에서 제일 사랑합니다~ 꽃보다 더 곱게~ 달보다 더 밝게~ 사자보다 용감하게 ~ 해피 벌스데이 투 유~!! 와우우우!!!”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사를 못 외웠는지, 종이에 써 놓은 것을 보고 부르는 로날도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옆으로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레비와 치프, 뒤이어 케이크를 들고 들어오는 릴카….
“생일 축하해, Ju! 내가 고른 케이크야. 치프는 초콜릿으로 하자고 그랬는데, 너도 알다시피 난 초콜릿을 좀 그만 먹어야 하잖아. 이것도 맛있겠지? 그치?” 릴카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사람들은 생일 축하한다며 박수를 쳤다. 나는 릴카가 내민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어제가 내 생일이었다는 것을.
어서 촛불을 끄라고 하는 치프의 말에 후- 부는데,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내 코가 벌겋게 달아오르자, 로날도가 울지 말라고 휴지를 건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면서도 웃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라서 중얼거렸다. “아, 왜 이렇게 눈물이 나지. 미안해요. 정말 감사한데….”
그러자 사수님 레비가 미안해하지 말라며 나를 안아주고 덧붙였다. “학교 때문에 바쁠 텐데 일을 열심히 도와줘서 고마워, Ju. 나도 너 덕분에 YV에서 일하는 게 즐거워. 처음 봤을 때도 상큼하고 좋았지만, 넌 진짜 오래 지낼수록 더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정말 고마운 말이었다. 오래 볼 수록 좋다니, 나도 그 말 덕분에 더 오래 살 것 같았다. 내가 우는 모습을 보고 치프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더니 뜬금없이 내 손에 부엌칼을 쥐어 주었다.
“이제 그만 뚝! 하고, 자르시지요 공주님.”
나를 놀려먹는 치프 옆으로 로날도가 황송하다는 듯한 손짓으로 접시를 내려놓았다. 역시나 그 둘은 진지한 분위기를 깨는 데 있어서는 환상의 콤비였다. 모두들 배가 고팠는지, 내가 케이크를 자르자마자 한 조각씩 받아갔다. 맛있게 먹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그래. 어디에서나 혼자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거야. 늘 벼랑 끝에 몰리며 사는 것 같아도, 가끔은 이렇게 행복한 날도 오니까.’
YV직원들이 준비해 준 케이크. 동영상에서 캡처해서 화질은 별로지만, 추억은 아직 생생히 살아있다.
늘 그렇듯이, 감동을 받아버린 나는 쉽게 조련당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스위스에서 버틸 힘을 조금 더 얻고 다시 열심히 살아보기로 했다. 힘들어서 진짜 죽을 것 같을 때 이렇게 다시 살아갈 힘을 조금 얻고, 결국 다시 똑같은 일을 반복하고…. 에휴. 국민은 나라를 닮는다고, 이래서 내 나라의 꽃이 피고 지고 또 피는 무궁화인가 싶었다.
다음 글은 조금 특별했던 에피소드, ‘대망의 크리스마스’로 돌아오겠다. 릴카는 모태 솔로인 나에게 사랑과 연인 생활에 대한 코치를 해 주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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