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의 크리스마스, 나는 또 솔로였지
피곤에 절은 퇴근 길이었다. 덜그덕거리는 트램을 타고 물끄러미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에서 벌써 트리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찌푸둥한 회색 하늘과는 사뭇 다르게,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표정이 들떠 보였다. 내 옆에 타고 있던 릴카도 그 모습을 보더니 불현듯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 날 같이 마켓 구경 갈래, Ju?”
그 날도 해야 할 과제가 이미 태산 같을 텐데…. 나는 대답하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고개를 돌려서 바라본 릴카의 얼굴이 조금 슬퍼 보였기 때문이다. 잠시 주저하던 나는 결국 이렇게 말했다. “그래. 저녁에 잠깐 시간 낼 게. 같이 구경가자.” 그러자 릴카는 신난다는 듯이 빙긋 웃고 나에게 초콜릿을 내밀었다. 거의 설탕이 안 들어간 비건 제품이라며.
세상에, 그렇게 쓴 초콜릿은 처음이었다! 입 안에서 초콜릿의 씁쓸함이 거의 가실 즈음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문득 열쇠를 돌려 문을 열다가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잠깐. 크리스마스 날 나랑 마켓을 구경 가겠다고? 자기 남자친구는 어떻게 하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에 중얼거렸다. “아아. 이제야 알겠다. 왜 릴카가 슬퍼 보였는지….”
릴카에게는 오랫동안 사귀어왔던 사람이 있었다.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이였던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이 생긴 것이 분명했다. 심지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말이다. 일단 그녀와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인지는 그때 만나서 물어 볼 생각으로 우선 초스피드로 과제들을 마무리 지었다.
이전 글에서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당시 나는 쓸데없이 시간과 비용이 드는 학교 프로젝트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경지에 이르고 말았다. ‘말미잘’을 주제로 주었던 학장님이 중도에 우리 팀의 주제를 ‘복어’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말도 안되는 프로젝트에 더더욱 말도 안되는 주제로 지금껏 했던 작업을 갈아 엎어야 한다니. 나는 우리 팀원들에게 그냥 모르쇠 전법으로 나가자고 했다. 최하 점수를 받더라도, 더 이상 스트레스라도 받지 말자는 것이었다. 매사에 죽어라고 열심히 하는 내가 팔을 걷어붙이고 그런 말을 하다니, 팀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서 감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단합하여 학장님에게 저항했다. ‘우리가 이러곤 몬 삽니다!’ 하며, 그 분께 공동 의견서를 제출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만 실행하겠다고 전했던 것이다.
아무튼 그런 파업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YV일을 하며 힐링의 시간을 가졌다. 또한, 더 이상 학점을 가지고 행패를 부리는 학장님의 태도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그 분이 학점을 무기로 사용한다면, 내가 학점을 신경쓰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그럼 그 분이 쓸 수 있는 무기가 없어질테니까. 그 사람이 짜 놓은 틀에서 더 이상 놀아나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대학에 다닐 때는 늘 수석을 차지하며 ‘과제 완성 뮤턴트’로 불리던 나였는데…. 사실 그런 마음을 다 가지게 되기까지, 거의 새로 태어나야 할 정도였다. 밤낮으로 일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답답증을 극복하고, 별 희한한 상황에 맞서서 내 목숨줄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다. 타국에서 병 걸려서 죽으면 객사인데, 그럼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내 인생이 너무 슬프지 않은가.
그 과정에서 내가 스트레스로 병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준 사람 중 하나가 릴카였다. 내가 밥을 못 챙겨 먹는 것 같으면 (직장 돈으로) 이것 저것 사다가 몰래 주머니에 찔러주고, 힘 내라고 응원도 많이 해 주던 사람이었으니. 지금 와서 릴카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를 생각해보면, ‘시나브로’라는 순우리말이 생각난다. 어떤 큰 에피소드가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조금씩 가까워지며 좋은 친구가 된 것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렇기에 난 크리스마스 마켓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냥 릴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혹시나 내 존재가 그녀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약속한 크리스마스 날 저녁이 되자 나는 대강 준비를 마치고 그녀를 만나러 벨뷰 광장으로 나섰다. 역시 사람들이 복작복작하게 많았다. 특히 쌍쌍이 보이는 연인들의 환한 미소가 전등들보다도 밝았다.
커다란 트리 근처에서 릴카를 만났다. 릴카는 이미 뱅쇼 (따뜻하게 데운 와인. 스위스, 독일 사람들은 Glühwein이라고 부른다.) 를 두 잔 사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탁자 언저리에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릴카는 아무 말 없이 뱅쇼를 마셨다. 그리고 드디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Ju, 언젠가 네가 그런 말 한적 있지? 커플은 잠정적 솔로고, 솔로는 잠정적 커플 후보라고. 축하해 줘. 나 이제 잠정적 커플 후보야.”
나는 무슨 일이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릴카는 잠시 망설이더니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사실 그녀는 남자친구와 헤어진지 꽤 되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를 너무 깊이 사랑했던 기억 때문에, 아직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취리히 시내 곳곳에서 그가 느껴져서 너무 괴롭다고 했다. 그리고 눈물 젖은 눈으로, 나더러 이제부터 하는 말을 잘 새겨들으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기처럼 쪽박 신세가 된다며.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내게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 혹시라도 동거하게 되면, 집은 무조건 네 이름으로 계약해 놔.
“진짜 끔찍한 게 뭔지 알아? 남자친구랑 헤어졌는데 갈 데가 생길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야. 얼마나 껄그러운데! 그리고 그 놈이 심지어 다른 여자를 보란듯이 그 집에 데리고 들어오는 경우가 있단 말이지. 내가 겪어봐서 알아. 통장하고 집은 무조건 네 이름으로 해 놔.”
2. 조금 있다가 결혼하자는 말은 믿지 마. 거짓말이니까.
“나는 그 사람이랑 몇 년을 사귀었어. 그런데 그 사람은 나랑 동거만 하고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거야. 돈이 없으니까, 아직 생활이 안정적이지 않으니까 자꾸 결혼을 미루더라고. 나는 그 말을 믿었어. 실수였지. 결혼하고 싶은 마음 없는 남자하고는 동거도 하지 마. 그놈은 지금 나보다 더 어리고, 예쁜 여자를 만나서 다른 데서 동거하고 있거든. 아마 그 여자도 헛물 켜고 있겠지.”
3.잘생긴 놈은 일단 경계 해.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들이 많거든.
“맨 처음에 옷 잘입고, 매너 좋고, 말 잘하고, 잘 웃는 인간들은 일단 믿고 걸러. 막 피하라는 말이 아니라, 마음 속에서 일단 거리를 두라는 거야. 왜 이런 사람이 나한테 접근하나 하고. 진짜 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너랑 오히려 눈을 잘 못 마주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마. 나는 잘생긴 놈한테 마음을 뺏겨서 몇 년째 끌려다녔어. 상대에 따라서, 네가 그 사람을 더 좋아하는 순간 사랑이 비참해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해.”
4. 네가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
“내가 더 잘 할게, 고칠게…. 수도 없이 들은 말이야. 하지만 내가 이 긴 연애의 끝에 깨달은 게 뭔지 알아? 사람은 정말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네가 좋아해서 만나는 그 사람의 성격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야.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의 성격과 싸워야 하는 게 99퍼센트고. 그리고 그 99퍼센트는 절대 변하지 않더라. 자기는 변했다고 하는데 절대 안 변하거든? 그럼 또 싸움이 시작되는 거야.”
5. 사람을 사귈 때는 꼭 다 따져보고, 상처받을 걸 생각하고 만나.
“누굴 진지하게 만날 때는 경제적인 능력, 성격, 인간성, 싹 다 따져야 해. 왜냐하면 상대방도 은연중에 그러고 있을 확률이 높거든. 그니까 조건 따지는 것에 괜히 죄책감 가지지 마. 사랑? 그런 감정을 느끼는 건 길어봤자 딱 6개월이야. 그 사람하고 지낼 시간이 6년이 될지, 60년이 될지도 모르는데 무슨 사랑만 가지고 만나니? 너도 나처럼 나이 들어 봐. 사랑만 쫒는 프리한 연애는 결국 방황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탁 들때가 온다니까. 물론 너는 모태 솔로라고 하니까 그런 걱정은 안 한다만….”
릴카는 한바탕 이야기를 늘어놓고 눈물을 훔쳤다. 나는 그녀의 빈 잔을 보고, 내 뱅쇼를 건넸다. 내 컵에서도 한 모금 마시더니 그녀는 한숨을 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진짜 비참한 건 뭔지 알아? 차였을 때는 내 자신이 혐오스러워진다는 거야. 그 놈이 너무 미우면서도 좋았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그 상처를 혼자 온전히 견디는 게 너무 아프다고.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 놈이 혹시라도 후회하며 돌아올까, 기대도 하고…. 진짜 한심하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글쎄, 나는 그런 사랑을 잘 해보지 않아서 모르겠어. 하지만 네 말을 들어니까 확실히 사람 만나기가 더 겁나네. 이대로 솔로의 늪에 더 깊이 빠질 것 같아.” 그 말을 들은 릴카가 피식 웃더니 물었다. 정말, 지금까지 내 인생에 단 한 명의 연인도 없었냐고. 혹시라도 지금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냐고.
“글쎄….”
사실, 생각해보니 지금껏 내 인기의 정도가 아주 지하를 뚫고 들어갈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가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나와 사귀자!’고 박력있게 말하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의 의도를 잘 읽지 못하는 사람이기에 인연이 이루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덤으로 난 내가 그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서, 그저 그런대로 솔로의 인생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위스로 오게 된 것이다. 외국에서 생존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연애는 무슨…. (이러면서 물론 나름 연애를 한다면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친 적은 종종 있었지만.) 외국 생활을 하며 사람에 경계가 높아지다보니, 가끔 거리에서 번호를 물어보는 사람들은 죄다 이상한 것 같아서 걸렀고, 내가 호감을 가질 법한 사람은 이미 임자가 있는 것 같으니 알아서 피했다. 그러니까 나는 결국 세계 어디에서나 솔로였다.
내 말을 듣던 릴카가 말했다. “나도 문제지만, 너도 참 문제다.” 그리고는 언젠가 연애를 할 마음이 있기는 하냐고 물었다. “하하, 당연하지! 난 언제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사람이라고!”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덕담을 남겨 주었다. “그래. 사실 솔로 라이프도 나쁘진 않지만, 너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니까 꼭 좋은 사람 만날 거야. 널 만나는 남자는 행운이지.”
우와, 성격 쎄기로 유명한 우리 릴카가 그런 말을 해 주다니. 난 고마운 마음으로 그녀를 안아주며 생각했다. ‘그래.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살아보면 알겠지. 내 인생에 그런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이윽고 나는 릴카를 위해 준비한 작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넸다. (당이 살짝 더 첨가된) 비건 초콜릿이었다. 그녀는 뜻밖의 선물에 감동을 받은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릴카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했다.
“릴카, 먹고 싶은 거는 어느 정도 맛있게 먹고 살아. 너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네가 솔로이든 커플 생활을 하든, 너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은 아주 많아. 절대 잊지 마!”
그러자 릴카는 나를 꼭 안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귀여운 Ju. 네가 남자였으면 난 진짜 너랑 사귀었을거야!” 하하. 그 이야기는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에게 들어왔던 말인데, 그 말을 스위스에서도 들을 줄은 미처 몰랐군. 다행히 기분이 조금 나아진 릴카는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맛있는 저녁을 사 주었다. 좀 더 활기차게 변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도 한층 밝아졌다.
두 솔로들의 크리스마스 저녁은 그렇게 저물어갔다.
이런 잔잔한 마무리 뒤로, 새 해의 시작을 알리며 거센 난관이 찾아왔다. 누가 알았겠는가,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진짜로 나에게 일어날지. (참고: 영화 ‘터미널’)
삼재가 들었던 것일까. 다음 글에서는 사고무탁했던 나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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