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조금 살 만해지자, 터져버린 '그것'
“그럼 이걸로 눈을 가리면 되는 거야, Ju?”
“네. 이 눈가리개를 하고 편안하게 말씀하시면 돼요.”
YV의 사무실에서 만난 브리나는 재미있다는 듯 내가 준비한 눈가리개를 했다. 그녀는 (나의 가족인 엄마 이후로) 내 프로젝트 최초의 외부인 참가자였다. 극적으로 학장님의 승인을 받은 졸업 프로젝트, ‘삶의 초상 (The Portraits of Life)’. 브리나는 과연 이걸 어떻게 생각하려나.
다행히 인터뷰는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나는 브리나에게 간단하지만 단순하지만은 않은 질문들을 제공했다. 그녀를 정의할 수 있는 물건이나 단어, 가장 소중한 것과 가장 두려워하는 것, 행복하고 감사했던 시간과 힘들었던 때 등등…. 기본적인 뼈대는 갖추고 있었으나, 질문들은 브리나의 대답에 따라 심층적으로 변화했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고, 안대를 벗은 브리나는 눈이 부셔서 찡긋하며 말했다. “우후! 엄청난 경험이네. 마치 무슨 시간 여행이라도 한 것 같아. 고마워 Ju. 사실 요즈음 힘든 일들이 많았는데, 나를 정리하는 시간이 된 것 같아.” 알고 보니 브리나는 힘든 상황들 때문에 상담 치료사를 정기적으로 찾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사무실에서는 늘 밝게만 보이던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고맙다며 나를 안아주는데 왠지 숙연해졌다. 성격 좋고 씩씩하게만 보였던 브리나가 그렇게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아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인생 속에는 영웅이 하나 둘 쯤은 살아있나 보구나. 그래서 한 사람의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단정 지으면 안 되는 거야. 항상 배우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깨달음을 얻은 나는 그녀에게 작은 선물을 건넸다. 인터뷰 내용을 기반 삼아, 브리나의 일생에서 행복했다던 순간을 담은 그림과 영상이었다. 영상을 제작하며 마치 그녀가 된 것처럼 나레이션을 진행했다. 그림을 그리는 매 손길마다 그녀의 행복을 빌었다. 정말 브리나가 스스로 원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도록 소망하며.
그 소망이 닿았는지, 곧 YV에는 나의 프로젝트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브리나가 회의 시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났다. 모두들 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던 것이다! “엥? 정말요?”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갸우뚱했다. 너무 의외였기 때문이다. 보통 스위스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을 열고 말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데.
당시 릴카는 스위스를 잠시 떠나 있었기에 자리에 없었지만, 다른 이들이 하는 말로는 브리나가 감동의 눈물을 비쳤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프로젝트이길래 그러는 건지 궁금증이 생겼다고 하던데. 어쩌다 보니, 고맙게도 YV의 마케팅 담당자인 브리나가 내 프로젝트 홍보를 톡톡히 해 준 격이 되었다. 원래 인터뷰 프로젝트는 인원 모으는 것이 가장 힘든 법인데, 브리나의 도움으로 YV의 사람들의 관심을 얻게 되니 더욱 고마웠다.
릴카가 바빠서 떠나 있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치프와 로날도, 샐리 등 다른 직원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 업무가 많았던 레비는 나를 응원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쉽게도 프로젝트에 참여하지는 못하겠지만, 네가 졸업을 잘할 수 있도록 돕고 싶어! 일이 너무 많다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업무 양은 조절할 수 있으니까.”
살면서 그렇게 많은 스크립트와 배경 음악, 그림과 영상을 단 기간 안에 만든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곧 학장님을 인터뷰하기로 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예민한 분인데, 인터뷰가 껄끄러워지면 어떡하지?’ 으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약속을 깰 수는 없는 법이니, 그저 최선을 다해 보는 수밖에. 다시금 심장을 옥죄어 오는 쫄보의 마음을 떨쳐 내려고 세수를 했다.
학교 내에서 인터뷰 방을 잡고, 마음속으로 질문 연습을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드디어 학장님이 약속 장소의 문을 두드리실 때까지.
“푸흡!”
학장님은 안대를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리셨다. 원래 참여자가 편하게 마음을 열도록 준비한 도구였지만, 어째 안대 덕분에 오히려 내가 덜 긴장했던 것 같다. 무섭기만 했던 학장님이 언뜻 귀여워 보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모습에 힘을 입어 질문들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들에 놀라며, 조용히 노트에 그 내용을 옮겨 적었다.
“… 나는 어릴 때부터 아주 소심한 아이였지. 혼혈이기도 했지만, 다양한 언어와 문화에 둘러싸여 살면서 혼란스러운 점이 있었거든. 물론 좋은 점도 많았어. 하지만 학교 같은 집단에서는 늘 외톨이였지. 아마 그때서부터 사람들 사이에서 수줍음 많은 사람으로 통했던 것 같아.”
천하무적 학장님이 소심한 분이시라니?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난 그분이 재즈 댄스를 좋아하시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꽃 가꾸기를 좋아하신다는 것도 참 의외였다. 게다가 직접 재배한 채소로 요리하시는 걸 즐기신다니.
그분은 담담하게 삶의 발자국들을 나에게 보여주셨다. 존경하던 어머니의 죽음, 이후에 이어진 고난, 스위스의 대학교에서 외국인 학장으로 겪은 설움과 고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결국 심리 상담소를 꾸준히 방문하셔야 했던 이야기….
마지막으로 학장님께서는 행복을 이렇게 설명하셨다.
“누구나 원하지만 영원히 잡아둘 수는 없는 것. 오후의 창가에 스치는 황금빛 햇살처럼 황홀하지만, 금세 스러지는 것. 그래서 그 순간 느껴야 하고, 감사해야 하는 것. 그런 게 행복 아닐까.”
지금껏 전혀 몰랐던 그분의 삶에 대해 알게 되니, 마치 새로운 문을 통해 학장님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졸업할 때가 다 되어서 그분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차가운 사회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셨는지, 그리고 왜 그 모습이 늘 경직되어 보였는지.
학생들에게 엄하셨던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자신이 소극적이었던 어린 시절을 극복했던 것처럼, 학생들이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을 일깨워주고 싶었기에. 그 말씀에 여러 가지 감정이 들썩거리는 게 느껴졌다. 결국 용기를 내어 물었다.
“… 혹시 그래서 저한테도 그러셨던 거예요? 지금까지?”
마침내 몇 년간 마음속에 두었던 질문을 밖으로 던졌다. 학장님은 잠시 침묵하셨다. 영겁처럼 느껴지던 그 순간이란.
긴장 속에서 들었던 그분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연하지. 넌 내가 가장 눈여겨본 제자 중 하나니까. 그 어떤 상황에서도 넌 절대로 포기하지 않잖아. 사실 그게 제일 중요해. 세상을 살면서 필요한 건 재능뿐만이 아니거든. 뭐든지 쉽게 이루다 보면 어려움에 금방 두 손을 들게 되는 법이야. 누구나 다 알아. 네게 재능이 많다는 걸. 그래서 난 네가 더 끈기 있고, 강해지기를 바랐어. 그럴 역량이 있는 애라는 걸 알았으니까.”
“······.”
“이제 네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봐, Ju.”
학장님은 마치 이모 같은 미소를 지으셨다. 낯선 모습이었다.
학장님은 마치 좋은 질문들로 뇌 마사지를 받는 것 같았다며 인터뷰 세션을 흡족해하셨다. 어떻게 그 분과 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돌아오는 길은 마치 소설의 한 장면 같았던 것만 기억이 난다. 트램의 창 밖으로 비치는 풍경은 고즈넉했다. 늘 보아 오던 풍경이지만 느낌이 사뭇 달랐다.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흐르는 오후의 햇살. 윤슬로 부서지는 그 빛나는 파편들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이 들었다.
‘학장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이 이런 것일까.’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게 느껴졌다.
더 이상 학장님이 무섭지 않았다.
이제 내가 그분을 알기 때문에.
학장님의 인터뷰를 적은 노트 옆에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왠지, 이제부터는 스위스에서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뿌듯해져 오는 마음 한편에 자신감이 차 오른다.’
아아.
하지만 우주의 기운은 이제야 좀 살만해진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사실, 지구 상의 모든 사람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그것’이 나타난 것이다. 수많은 이들을 공포의 늪에 몰아넣고, 집에 가두어 두고, 삶의 터전을 잃게 한 ‘그것’.
불안한 전화벨이 울리고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영아! 코로나 상황이 심상치가 않아! 빨리 한국으로 돌아와야 해!”
하아…. 역시 우리 치프의 말이 진리였던가, ‘미래는 아무도 모른다’고. 사상 초유의 사태에서 (또다시) 급히 귀국길에 올랐던 나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졸업은? 직장은?
다음 글이자 이 시리즈의 마지막 글에서 모든 것이 밝혀진다.
다음 글: 25.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