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열다

by 이서후

이른 아침에 전화벨이 울렸다. 다급하게 들려오는 아빠의 목소리.


“주영아, 빨리 선택해야 해! 지금 마침 비행기 좌석이 딱 한 군데 남아있어! 이거 타고 올래?”

“뭐… 뭐라고요?”


잠이 덜 깬 얼굴로 허겁지겁 일어났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떠나야 하나? 이미 전날, 학교에서는 되도록 빨리 스위스를 떠나라는 통보를 내렸다. 여기서 나 같은 외국인 학생이 ‘그것’에 감염되기라도 한다면, 도와줄 수 있는 게 전혀 없으니까. 온 세상을 패닉으로 몰아넣은 그 바이러스의 이름은 바로 COVID 19.


“… 그래요. 갈게요.”


일단 직감이 이끄는 대로 대답을 했다. 더 이상 부모님의 걱정을 두고만 볼 수도 없었고, 더 지나면 귀국의 때를 놓칠 수도 있으니까. 비행기 시간은 당일 오후! 서둘러 가장 급한 짐부터 챙겼다. 개인 용품, 노트북, 충전기들, 몇 벌의 여벌 옷가지. 냉장고와 쓰레기는 어서 정리하고, 대충 집을 정리해 놓았다.


나가려는 순간, 잠시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러 나날을 함께하며 정든 나의 ‘집님’. 전기 코드도 다 뺐고, 창문도 다 닫았는데,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문을 잠그며 이렇게 생각했다. ‘아주 길어봤자 반년 정도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이 사태만 진정된다면….’


아아, 그때 작별인사라도 해 둘걸. 그 날이 집님을 보는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는데.


급하게 도착한 유령 공항의 풍경은 적막했다. 그나마 몇 없는 사람들은 경계 어린 표정으로 서로를 피해 다녔다. 게이트 D 쪽으로 향하는데, 예전에 얼토당토않은 비자 문제로 수용되었던 공간이 보였다. (20, 21화 참고하기)


수용소의 데스크 직원 J. 모히또 씨, 청소부 메를린 아주머니, B 경감님. 부디 다들 무사하셔야 할 텐데. 슬쩍 살펴보니 수용소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혹시 방역 문제 때문에 잠시 문을 닫은 것일까. 잠시 서 있다가 눈길을 거두고 탑승구 쪽으로 향했다. 씁쓸하고도 슬픈 일이구나. 이렇게나 걱정스러운 심정으로 그들과의 추억을 떠올려야 한다니.


괴이하고도 고요했던 공항의 모습. 그나마 있던 항공편들은 줄줄이 취소되고 있었다.


붉은 글씨로 취소되는 비행 편들. 휴우, 다행히 내가 급하게 타게 된 비행 편은 굳건했다. 혹시, 정말 하늘이 도우신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사실, 그날 아침 전까지만 해도 끝까지 남을 생각이었으니까. 부모님과도 전날 오후에 상의를 끝냈었다. 조금 더 버텨 보기로.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아빠께서 왠지 아침에 항공편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드셨다고 한다. 그래서 확인을 해 봤는데, 전날까지는 없던 딱 한 좌석의 빈자리를 발견하신 것이었다!

'이런 건 거의 종교적인 체험에 가깝다! 목숨을 귀히 여겨야겠군.'


정신없이 한국에 돌아오니 검사와 격리 기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내에서 감염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겁이 좀 났지만, 그 또한 그저 하늘에 맡기기로 했다. 하루 이틀 후, 마침내 음성 결과를 받았을 때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흐엉! 엄마 아빠, 저 살아 돌아왔어요!" 수렁에서 건진 자식을 보듬듯이 날 안아주셨던 두 분. 우리 가족사에 길이 기록될 상봉의 순간이었다.


이제 한국 치킨을 먹을 수 있어서도 다행이었고, 졸업 관련 일도 한시름 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감사하게도 학장님께서 허가를 내 주신 덕에, 한국에서 원격으로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출국 전에 학장님을 인터뷰한 것이 신의 한 수였던 듯하다. (빅 픽쳐를 그려주신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하아, 그런데 인터뷰하기로 약속한 사람들은 다 어떡하지?" YV의 일은 이전에도 원격으로 진행해 본적이 많았기에 큰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졸업 프로젝트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했다. 결국 이미 잡혀있는 일정들은 화상 통화로 진행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화상통화 인터뷰들은 잊지 못할 추억들과 스크린샷들을 남겨주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파라오 마냥 티셔츠를 뒤집어써서 안대를 만든 로날도와, 아예 자기 방에서 드러누워버린 치프의 모습이랄까. (인터뷰할 때 편하게 얘기하라니까, 정말 자리 깔고 누워버릴 줄은 몰랐다.) 그들의 흑역사는 두 인물의 동의 하에, 내가 소중히 간직하면서 소소히 배포하고 있다.


(좌) 로날도, (우) 치프.


아무튼 그렇게 화상 인터뷰를 하다 보니, 의외로 장점이 많았다. 다들 집에서 편하게 얘기하는 게 덜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거의 잠옷 차림으로 있는 서로를 보며 좀 더 캐주얼한 느낌도 있었고. "근데 Ju, 너 스위스 돌아올 거지? 그렇지?" 로날도의 물음에 나는 밝은 표정으로 답했다. “당연히 곧 가겠지! 늦어도 내년쯤에는 갈걸?” 무슨 배짱이었을까 모르겠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당연히 곧 스위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게 하고 있었으니.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사태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주영아, 아무래도 짐을 빼 와야 하지 않겠니?” 보다 못한 부모님의 말씀이었다. 집님을 볼 마지막 희망의 보루가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나는 섭섭한 마음을 삼키며 브리나의 도움으로 짐을 꾸렸어야 했다. 맘씨 좋은 브리나는 직접 가족들을 동원하여 짐을 싸서 해외 이삿짐센터에게 넘겨주었다. 심성 고우신 집주인 할머니는 월세와 청소 비용도 보증금으로 퉁쳐주셨다. (예전에 꼬박꼬박 인사를 잘했던 덕이렷다.)


보물처럼 쌓아두었던 라면은 브리나의 가족에게, 전기밥솥은 치프에게, 그릇과 컵 등은 YV의 사무실에 기증했다. "우와, 많기도 하다! 잘 먹을게, Ju! 근데 이 라면은 좀 매울까나?" 브리나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며 코끝이 찡해왔다. 정말 고마워서 선뜻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브리나, 정말 감사해요. 어떻게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제가 나중에 스위스 갈 때, 꼭 맛있는 것 사 드릴게요." 먹는 것을 최고로 아는 내가 생각한 방법은 역시 맛집 탐방뿐이었다. 그러자 브리나는 활짝 웃으며 손사래를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에이 뭘 이런 걸 가지고. 너는 나한테 진짜 특별한 선물을 줬잖니, Ju. 내가 받은 감동이야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었거든. 내 인생의 이야기를 그토록 아름답게 표현해 주다니, 네가 내 삶을 영화로 만들어 준 것 같았어! 그 포로젝트에 날 초대해줘서 다시 한번 고마워."


도움을 받는 것은 나인데, 되려 고맙다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이런, 더욱더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내가 언젠가는 반드시 이 은혜를 갚으리라. 기다리세요, 브리나. (언젠가) 제가 갑니다. 반드시!


브리나가 찍어서 보내준 사진. 그녀가 정갈하게 싸준 짐의 모습과, 내가 기부한 음식들.


아무튼 그렇게 정신은 스위스에서 졸업 중이지만, 몸은 한국에서 먹고 자는 희한한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인터뷰를 토대로 시나리오, 나레이션, 그림, 영상, 음악 작업을 했던 나는 다른 시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참여자의 인생을 담은 노래 만들기'!


음악이라고는 당최 배워본 적이 별로 없지만 (초등학교 때 배운 유일한 악기가 피아노인데, 체르니 100에서 중도 포기했다. 한때 쳤던 기타 코드는 4-5개 밖에 기억이 안 난다.) 결국 노래까지 만들어 선물하기로 한 욕심쟁이. 물론, 스스로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프로젝트 의도와 잘 맞았기에 그저 해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할 일은 태산과도 같았다. 일단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게라지 밴드로 작사 작곡을 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어폰에 달린 마이크로 녹음을 하다가, 도저히 이건 아닌 것 같아서 작은 마이크를 구입했다. 기계맹인 내가 서툴게나마 녹음한 곡에다가 앨범 아트까지 손수 만들어서 참여자에게 전달하였다. 그 퀄리티가 어떻든, 진심이 우선이니까!


모든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지만, 모든 걸 내려놓는 심정으로 선물들을 전달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들으면서 웃기라도 하지 않겠나 하는 마음으로. 실제로 노래를 받은 사람들은 그 신박한 선물을 보고, 듣기도 전에 일단 폭소를 터트렸다는 후문을 전했다. 아직도 '오오 Ju~~ 노래도 하는지는 몰랐Ju~~'하며 빙글거리며 웃던 로날도의 모습이 생각나는군. 아아, 쥐구멍 속에라도 숨고 싶어라.


그 모든 혼돈의 도가니에서 영어로 논문을 쓰는 동시에 만들어야 했던 결과물, 대망의 웹사이트! 그 또한 스스로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참으로 큰 일이었다. 그때는 정말 팔(혹은 다리)가 많은 문어가 되고 싶었다. 모든 걸 다 해내려니 양 손이 부족했기에.


다행히 개발은 어찌어찌하여 아는 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보람차고 기똥차게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은혜로우신 분은 영(Young) 하시고 호의로우신 분이니까, '영.호'님이라고 부르겠다. 감사합니다, 영호 님!! 덕분에 아직도 웹사이트가 죽지 않고 살아있습니다.


참여자 피드백부터 프로젝트의 모든 그림, 대표 영상, 노래 등이 들어있는 웹사이트.


(나의 피, 땀, 눈물이 들어있는 졸업 프로젝트 링크는 여기서 확인하기: http://www.portrait-life.com/ )


위의 링크를 확인하면, 내가 그동안 그린 그림들과 작사 작곡한 음악들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만약 혹시라도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으신 분은, 저 사이트 메뉴창 옆에 있는 'co-create your story' 버튼을 눌러주신 다음, 메일 한 통만 쏴 주시면 접수 완료. 프로젝트 참여비는 '진심'이며, 돌려드리는 것은 '사랑'!)


태양의 열기가 절정에 달하기 시작하는 유월 말. 드디어 대망의 파이널 프레젠테이션 날이 열렸다! 이제 곧 졸업이라니. 떨릴 새도 없이 심장이 벅차 왔다. 정작 발표는 어떻게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나지만, 다행히 수월하게 끝났던 것 같다. 교수님들과 학생들은 Zoom을 통하여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들의 박수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매미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워후! 최고다, Ju! 짝짝짝짝-!"

"맴맴매- 찌르르르- 싸아-!"


장장 햇수로 4년 간의 여정의 마지막 날. 땅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매미가 드디어 지상에서 날개를 펼치고 뜨겁게 울던 날, 나도 울고 말았다.


참여자들에게 선물한 일부 그림들의 콜라주. 아직도 그들의 이야기가 생생히 가슴 속에 남아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언제나 꽃잎이 휘날리는 엔딩을 기대할 수는 없는 법. 스위스는 역시 스위스였다. 언제나 실망스러운 차별이 존재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절대 모두를 실망시키지 않는 그놈의 나라. 섭섭한 엔딩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번엔 학교 사람들보다는 외부 심사위원들이 문제였다.


뼛속부터 스위스 사람인, 나이 든 외부 심사위원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네가 한 건 아름다운 프로젝트이기는 하나,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그림을 그리고, 음악과 영상을 만들 수 있지는 않아. 그럼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주겠지. 그럼 네 존재는 이 커뮤니티에 도움이 안 되는 거 아니겠니? 그건 아주 큰 감점의 요인이야. 게다가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는데, 나는 네 그림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


학사 논문을 누가 읽냐며, 학생들의 논문도 보지 않았다고 스스로 말하던 그녀. 누가 보더라도 그 사람은 내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사실, 그분의 평가는 들을수록 ‘그냥 네가 싫어’에 가까웠다. 하긴, 지금껏 당한 것을 생각해 보면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심지어 프레젠테이션을 남들보다 뛰어나게 해서 혼난 적도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기를 죽인다’는 이유로···. 이미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몇몇 스위스인들에게, 나 같은 외국인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는 건 용서 못할 일이라는 것을.


그 여인네의 평가를 듣는데, 같은 과 학생들 중 나를 좀 괴롭히던 한 여학생의 잊을 수 없는 말이 생각났다. 몇 해전, 내가 점수 때문에 힘들어할 때였다. 그녀는 나에게 상심하지 말라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스위스에서 취업할 거 아니잖아, Ju. 어차피 그 일자리들은 원래 우리 몫이니까. 그러니까 넌 좋은 점수 필요 없지 않아?”


그래. 세상에는 그런 인간들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행복할 수 있다. 그게 중요하지.


사실, 나는 지금껏 두 가지를 못 견디는 습성을 가지고 살아왔다. 그것은 바로 '불공정한 배식'과 '불공정한 점수'. 하지만 더 이상 그 심사위원과 내 프로젝트에 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로 말을 섞는다는 것 자체가 그 프로젝트와 참여자들에 대한 모독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난 이제 졸업했으니까, 그런 사사로운 감정들도 졸업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비록 사 년 간 자잘한 전투에서 그토록 처맞았더라도, 큰 전쟁에서는 결국 이긴 셈이니까!


그리고 엄연히 따져보면 불쌍한 건 그들 아니겠는가. 사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그렇게 꽉 막힌 스위스 사람들을 긍휼히 여길 의무가 있다. 일단 그들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렇게 다양하고도 맛있는 치킨이 없으므로. 나는 나라를 잘 타고나서 평생 먹을 수 있지! 그것만으로도 이미 매우 가혹한 형벌 이리라. 한국의 산해진미가 없는 삶을 상상해 보면, 자연스럽게 애통함으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래서 졸업하는 마당에, 큰 맘먹고 다 용서해주기로 했다. 대인배마냥.


졸업 기념 치킨 파티! 후훗, 역시 승리는 치킨을 가진 자의 몫.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온 졸업 시즌이 끝나고, 참으로 이상한 고요가 찾아왔다. 돌풍에 휩쓸리듯이 살아온 세월이 갑자기 무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앞으로 뭘 해야 하나 막막하기도 했다.


면벽수도를 하는 수행자처럼, 나만의 생각 동굴로 들어갔다.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생각해보자.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YV에서의 일도 이대로 계속해야 하는 걸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은 뭘까?


일주일 정도 YV에서 오는 자잘한 업무들만 처리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민만 했다. 끊임없이 내 인생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앞서 추측해 보았다. 그리고 내 심장이 현재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했다.


마침내 생각 동굴에서 나온 나의 손에는 이러한 지도가 들려 있었다.


나는 과연 이 세 갈림길에서 무엇을 선택했을까?


다음 글에서는 그 답과 함께, 매거진을 마무리하는 후기로 돌아오겠다! (드디어 첫 시리즈 마무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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