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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후 Sep 01. 2021

결국 내 곁에 남는 사람은

그렇게 사랑을 배우다

겉으로 보기에 나는 조용히 컴퓨터 앞에 앉아서 타자를 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그렇게 시끄러울 수가 없었다. <스크룬하이>의 주인공들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내용들을 하나씩 글로 옮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루딘. 보리얀과 만나서 한 대화 내용은 다 적었어. 그 다음은? 그 다음을 보여 달라구!"


내가 요구할 때 신기하게도 어떤 인물들은 자기 얘기를 술술 풀어 놓았고, 어떤 인물들은 나와 밀당을 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나 잡아 봐라~ 내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게?'라며 이야기 속에서 중요한 사건만 저질러놓고 도망치기 바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훌라르'다.



훌라르는 <스크룬하이> 4권 중 내가 만난 주인공들 중 가장 미스테리한 존재였다. 그는 맨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발소리 없이 사라졌고, 고요하게 불타는 듯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저렇게 망토를 쓰고 있는 모습으로 그리게 됐나 보다.


그렇게 다양한 성격의 주인공들이 보여주고 들려주는 이야기를 적어 내리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내 필력의 한계였다. 고등학교 때 동화책 <크리스마스 거품 대소동>을 내보기는 했지만, 난 사실 한 번도 스스로를 진짜 '작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칭호 자체가 과분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막연히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방대한 세계관을 가진 소설로 그 시작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서인지, <스크룬하이>를 쓰면서 항상 마음이 시끄러웠다. 주인공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옮기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 차라리 글쓰는 것 보단 그림 그리는 게 더 나은 것 같은…. 아니다. 그림 그리다 보면 차라리 글 쓰는 게 더 나은 것도 같고. 하아, 진짜 답 안 나온다. 난 무슨 배짱으로 이걸 시작한 거지? 글도 그림도 뭐 하나 맘에 들게 잘 하는 게 없잖아. <스크룬하이>의 이야기는 도대체 왜 나한테 왔을까? 나보다 훌륭한 사람을 찾아갔으면 훨씬 더 잘 써 줬을텐데.'


이제서야 느끼는 점이지만 그 감정의 산을 넘으며 내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기적이었던 것 같다. 하루에도 스무 번은 더 같은 이유로 괴로워했다. 내가 이 장편을 쓰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우울감, 내가 이 길을 제대로 선택했는지 모르겠다는 불안함이 항상 먹구름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그래서인지 늘 부모님께 글을 보여드리며 이렇게 묻는 게 습관이 되었던 것 같다.

"어때요? 재밌어요?"


감사하게도 부모님께서는 언제나 내가 써 내려갈 다음 에피소드를 기다려 주셨다. 그리고 첫 독자로서, 정말 진심을 다해서 이야기를 재밌게 읽어 주셨다. 그래도 난 늘 이렇게 툴툴거렸다.


"엄마 아빠는 제 부모님이시니까 그렇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는데요?"

"일단 우리라도 재미있게 읽으면 됐지 뭘 그러니. 나는 좋구만. 호호, 더 써 보거라~"


엄마는 (특히 훌라르를 좋아하시는) 독자로서 나에게 힘을 많이 실어 주셨다.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두 분이었고, 그 두 분의 응원은 결국 내가 네 권 분량의 장편 소설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 가장 큰 힘이 되었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가장 응원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 그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당시는 잘 몰랐다. 오히려 아무 책망의 말 없이 나를 지지해 주시는 모습에 조금 의심마저 들었다. 그래서 하루는 이렇게 터놓고 물었다.


"다 큰 자식이 글 쓴답시고 이러고 있는데, 안 답답하세요? 저, 지금이라도 직장을 잡아야 할까요?"


수심에 가득 차 있던 나와는 다르게 부모님은 빙긋이 웃으셨다.


"불안해서 너더러 직장 잡으라고 할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네가 갈 길을 지지하지도 않았겠지. 주영아, 그때도 말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네가 무슨 일을 하던 행복한 거야. 생각보다 인생 참 별거 없거든. 그리고 이제 시작인데 뭘 그러니? 길게 봐라."


그 말씀에서, 부모님께도 나만큼이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보지 않은 길을 선택한 자식을 믿어주는 용기. 그리고 그 자식이 힘들어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응원할 용기.


내가 스스로를 의심하고 자책하는 과정 중에서도 부모님께서는 단 한번도 나를 독촉하지 않으셨다. 다만 기다려 주실 뿐이었다. 인내를 통해, 내가 인생에서 거쳐야 할 성장의 단계를 선물해주시면서.


그렇게 <스크룬하이>를 쓰며, 사랑이라는 가장 큰 용기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실제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그것이 온라인이 되었던, 오프라인이 되었던 결국 내 곁에 남는 사람은 내 마음 가까이, 주변에서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니까.


아래는 (전 화부터 진행되던 대화에서) 아파라티 할아버지와 루딘이 나누는 대화의 일부다. 루딘은 모테라의 저주에서 본 장면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만약 그 배에 탄 모두가 죽는다면, 그때 그냥 저도 같이 죽었으면 좋겠어요.”

  “왜, 너라도 살아야 하지 않겠니?”

  루딘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아뇨. 그러면 너무 불행할 것 같아요, 우리 아빠처럼.”

  아파라티 할아버지가 아무 말 않자, 루딘은 입술을 깨물더니 이렇게 말한다.

  “모두를 잃고 혼자 살아남는다는 게 얼마나 지옥 같은 일인지 보고 자랐거든요. 저는 아빠처럼 혼자만 살아남고 싶지 않아요. 매일 그리워하고 자책하면서 고통스러워하느니, 차라리 괴물과 싸우다가 같이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때 네 아빠가 혼자 살아남았다고 누가 그러디?”

  노인의 물음에 루딘이 고개를 든다. 할아버지는 미소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에겐 네가 남아있지 않았느냐, 루딘.”

   “······.”

  “사실, 네 말대로 아픈 기억은 평생 사라지지 않는단다. 다만 조금 색이 바랠 뿐이지. 그리고 치유될 수 없는 상처들도 있어. 날마다 덧나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지치게 하는 그런 영혼의 상처들 말이다. 그런데도 네 아버지는 사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너와 함께 남아있기를 선택했구나. 삶이 주는 힘든 짐들을 모두 떠안고 누군가를 지킨다는 것, 그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다.”

  루딘은 아무 말없이 종이를 응시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런가요···.”

  “그럼. 네 아버지는 네 어머니만큼이나 용기 있는 사람이란다, 루딘.”




용감한 사랑은 기적을 만들고, 생각보다 기적은 가까이에 있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이든, 연인 간의 사랑이든, 아니면 그 어떠한 형태의 사랑이든 상관없다. 그 무엇이 되었던 진짜 사랑은 상상하지 못한 일들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난, 지금 누군가 내 가까이서 이 글을 읽어주고 있다는 것 또한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리적인 공간을 초월하여 누군가와 글로써 생생히 소통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아마도 독자님과 나는 기적이 이어준 인연이 아닌가 싶다.


브런치를 통해 만난 인연이 곁에 남기를 바라며, 다음 글에서는 색다른 곳으로의 짧은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서쪽 호수 옆에 있는 방랑자들의 섬, '잘리사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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