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들과의 ‘스피드 데이팅’

치프(Chief)의 강렬했던 첫인상

by 이서후

드디어 기업의 대표들과 첫 대면을 하는 날이 왔다. 봄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취리히의 풍경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임팩트 허브가 있는 Limmatplatz로 향해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마저 떨리는데, 꽃구경할 여유가 어디 있는가. 내 옆에는 그나마 나와 가까웠던 친구, 클레아가 있었다. (이제부터 나오는 사람들은 실존 인물이나, 이름은 모두 본명과 가까운 가명이다. 참고해 주시기를.) 둘 다 운 좋게도 '여름 기업 프로그램'의 1차 심사를 통과했던 것이다. 기업 사람들을 만날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예쁜 테라스가 있는 벽돌 건물 앞에 도착했다.


임팩트 허브의 모습. (출처: 취리히 임팩트 허브 웹사이트 https://zurich.impacthub.ch/media/)


빈 손으로 온 클레아와는 달리, 나는 무거운 가방을 낑낑대며 들고 왔다. 그걸 보고 클레아가 눈이 동그래져서 물었다. “그 안에 대체 뭐가 든 거니?” 나는 씩 웃고 말했다. “아, 이거. 내가 만든 책들이야. 혹시라도 관심 있어하는 기업들에게 보여 주려고. 아직 포트폴리오 준비할 시간이 없었거든.” 클레아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무거운 무기를 장착한 용사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조금 우스워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기업 사람들에게 최대한 준비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짧은 시간 내에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내가 한 프로젝트 중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실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잘한 일이다. 이날 스피드 데이팅을 본 다섯 개의 회사에서 모두 2차 면접을 보자고 했으니. (과거의 나에게 궁둥이 팡팡!) 근데 재밌는 건, 이 다섯 개의 회사 대표들 중 정작 내가 들어간 기업의 치프(Chief)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인연은 따로 있다는 건가?


아무튼 임팩트 허브에 들어가니 친절한 직원들이 내 이름과 지급된 QR코드를 확인하고,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카페처럼 예쁘게 꾸며진 내부의 모습은 아늑했다. 사람들이 벌써부터 사이좋게 서로를 소개하며 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프로그램이 진행될 준비가 마무리되자, 진행자인 이자벨라 씨가 마이크를 잡았다.


“임팩트 허브의 ‘여름 기업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이 어떤 날인지는 다들 알고 계시죠? 서류 심사에 통과한 학생들이 마침내 기업들과 첫 미팅에 도전하는 날이죠! 그럼 프로그램 진행 순서를 간략히 말씀드릴게요. 먼저 기업들의 자기소개 시간이 딱 1분씩 주어집니다. 학생들은 그걸 듣고, 마음에 드는 다섯 개의 기업들을 생각해 두었다가 미팅 표를 먼저 선점하셔야 해요. 왜냐하면 스피드 데이팅은 개인당 다섯 개의 기업들하고만 하실 수 있거든요. 각 기업과의 스피드 데이팅 제한 시간은 5분입니다. 물론, 엄청나게 정신없을 테지만 행운을 빌어요. 그럼 마음에 준비를 하시고, 시작하겠습니다!”


너무 많은 정보가 한꺼번에 쏟아져서 좀 당황스러웠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버버 거리며 서 있는데 벌써 첫 번째 기업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옆에선 이자벨라 씨가 정말 커다란 전자시계를 들고 시간을 쟀다. (역시 시계의 나라다웠다.) 소개를 채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가차 없이 무대에서 아웃당하는 대표들이 속출했다. 그래도 마치 게임처럼 진행되었기에,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자기소개가 이루어졌다. 또한 무대에 서서 애쓰는 대표들의 모습 덕분에 학생들의 긴장도가 점차 내려가는 게 보였다.


이윽고 몇 명의 차례가 지나자 나와 속닥거릴 심리적 여유가 생겼는지, 클레아가 말했다. “저기, 지금 올라오는 저 사람! 누군지 알지?” 나는 모르겠다는 듯이 그녀를 쳐다봤다. 그러자 클레아가 나를 옆으로 바짝 당기며 소곤댔다. “임팩트 허브 웹사이트 안 봤어? 사전 관심 투표에 압도적으로 1등 했던 기업 대표잖아!” 아하, 그제야 기억이 났다. 1차 심사에 합격한 학생들은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기업들에게 관심도를 표현할 수 있었는데, 그중 AI로 투자 전략을 세우는 금융 회사 하나가 엄청난 표를 얻었던 것이.


커다란 키에 모델 같은 핏을 자랑하는 젊은 남자가 무대 위로 성큼 올라섰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비주얼 때문인지 장내가 조금 조용해졌다. 난 그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 그 금융 스타트업 사람이구나. 근데 그 회사에서 디자이너는 안 뽑는 것 같던데? 투자 전략가랑 데이터 분석가를 찾고 있대서….” 이윽고 스탑 워치가 작동하자, 그 남자는 거침없는 영어로 자기 회사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흰색 반팔에 청바지, 엄청나게 자신감 있는 태도와 몸짓! 그가 일목 요연하게 소개를 마치자, 시계는 딱 일분이 지났다며 스탑 시그널을 울렸다. 그 완벽한 타이밍에 진행자인 이사벨라 씨도 놀란 눈치였다.


나는 유유히 무대에서 퇴장하는 그 젊은 대표를 보며 디자이너인 내 처지가 참 안타까웠다. 한눈에 봐도 저 기업이 장래성이 밝아 보이는데, 아마도 난 저 기업하고 엮일 일이 없겠지. 금융에 관련된 일은 내 전공과 너무 멀지 않은가. 데이터 분석을 배울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자벨라 씨가 프로그램의 다음 순서의 시작을 알렸다.


그때서부터는 정말 혼돈의 시간이었다. 기업들과의 스피드 데이팅 티켓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가까스로 다섯 곳과의 면접 기업을 얻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 아주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미술관에 관련된 스타트업과 미팅을 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 그 금융 기업의 대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앞에 있어야 할 학생의 자리가 마침 공석이었다. 왜 저 미팅 자리가 비어있나 싶어서 쳐다보다가, 그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 사람이 웃으며 나에게 먼저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엉겁결에 나도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내 면접 차례가 돌아와서 미술관 스타트업과 스피드 데이팅을 시작했다. 나는 열정적으로 내가 직접 쓰고, 그리고, 디자인하고, 번역한 더미북들을 보여주며 5분을 알차게 보냈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일어서며 옆 테이블을 흘긋 보았는데, 금융 기업의 대표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기업의 다른 사람이 대신 학생들을 면접하고 있었다. ‘… 그렇군. 에이, 뭐가 됐든 다시 볼 일 없겠지.’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클레아의 스피드 데이팅이 끝나기를 기다린 후, 그녀와 함께 임팩트 허브를 떠났다. 나와보니 벌써 어둑어둑한 저녁이었다. 면접들을 괜찮게 봤다며 기분이 좋아진 클레아가 조잘댔다. “내가 뒤에서 봤는데, 그 금융 회사 대표가 떠나기 전에 네가 말하는 걸 되게 흥미롭게 쳐다보더라.”


정말 그랬다고?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난 클레아가 하는 소리를 그저 듣고 넘겼다. 자기 회사랑 스피드 데이팅도 안 하고, 심지어 옆 테이블에서 열성을 토한 학생에게 (그것도 디자이너에게) 그가 무슨 관심을 가지려나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금융 기업과의 인연을 기대할 구석이 없어 보였다.


그 핸섬한 대표에게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을 때까지.


다음 글에서는 결국 나의 치프가 된 그 사람과의 심장 뛰는 면접에 대해 적어 보겠다. 영어 울렁증 극복과 성공적인 면접을 위한 꿀팁도 함께.


다음 글: 5. 뜻밖의 전화, 그리고 면접

keyword
이전 04화왕초보도 성공하는 CV 작성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