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X세대 팀장, 밀레니얼 팀원(2)
팀 카톡방에 남겼다. ‘나래씨 10분 있다가 챌린지 룸에서 저랑 얘기 좀 해요.’
상쾌한 아침인데 잠도 안 깨고 며칠 동안 연이은 면담과 문제해결에 진이 빠졌다. ‘오늘의 메뉴는 밀레니얼 세대와의 대화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약 색깔인 더블 샷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들이키고 다이어리를 열고 펜을 몇 번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나래씨가 들어왔다.
“앉아요. 바쁠 텐데 아침부터 따로 불러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저도 팀장님께 드릴 말씀도 있고.”
“네. 할 얘기 있으면 먼저 해요.”
“팀장님 좀 말씀 드리기 죄송하긴 한데 저 이제 운영하는 업무를 안하고 싶어요. 업무조정을 좀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학교 졸업하고 기획자로 성장하고 싶어서 K그룹 기획직에 지원한 건데 운영 일을 주로 해야 했다면 다른 회사에 갔어도 되는데 저는 제 꿈이 있어서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었거든요. 근데 입사하고 하는 일은 생각했던 것도 너무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 팀은 분명히 기획팀인데 제가 하는 일은 기획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경력이나 전문성에 있어서 제가 여기서 하는 일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실제로는 하는 일이 너무 갭(Gap)이 큽니다. 좀 조정해 주실 수 없을까요?”
“네. 그건 좀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우리는 팀입니다. 당장 제가 업무를 조정해 줄 수 있다는 것도 약속할 수 없는 일이고요. 그보다 저는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나래씨한테 해보고 싶은데 나래씨가 생각하는 기획자는 뭔가요?”
“저는 사실 사람이 입사할 때마다 경력직으로 기획자를 선발할 때도 마찬가지이고 다들 기획자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저한테 합니다. 자신의 경력에 오랫동안 기획자로 컨설턴트로 일해 온 저의 노하우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고 기획 일을 배워보고 싶다고 합니다. 그 기획 일이 뭘까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 차이가 있을 텐데. 저는 업무조정에 앞서 나래씨가 되고 싶은 기획자, 하고 싶은 기획이라는 일이 뭔지 솔직히 물어보고 싶네요.”
“제가 생각하는 기획자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리서치를 하고 가지고 있는 자원을 가지고 일을 설계하고 만드는 일, 기획안을 만들고 사업 예산을 짜고 뭐 그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과서적으로는 맞네요. 근데 실제 사업이 돌아가는 현장에서는 기획이라는 일은 나래씨 생각만큼 우아하지는 않습니다. 일의 단계로 볼 때 아주 상위에 있는 엘리트들이 하는 일도 아니고요. 얘기한대로 고객들이 가지고 있는 니즈, 사업에 바탕이 되는 아주 깊숙한 고객들의 마음을 조사하는 일부터 일을 디자인하고 기획해서 안을 내고 예산을 받아서 실행을 하고 운영을 하는 일인 것은 맞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대박을 치는 기획자들처럼 아름다운 일도 아니고 많은 안을 내더라고 한 건도 윗 분들의 의사결정을 못 받고 쓰레기통에 던져질 수 있고 다시 밤을 세워 새로운 안을 준비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팀장님 저는 학교 다닐 때 교육학과 경영학을 복수전공 했고 교육기획자의 꿈을 이루려고 이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어느 정도 정해진 수련 기간이 눈 앞에 보인다면 운영 일도 열심히 해 보겠지만 저희 팀이 돌아가는 걸 보면 사실 언제 제 손으로 기획안을 만들어 볼 수 있을지 앞에 보이지 않는 게 사실입니다. 그냥 선배들이 남겨 둔 허드렛 일이나 하면서 월급 받고 싶지는 않습니다. 팀장님 세대는 다르시겠지만 요즘은 정말 전문성이 중요한 시대인데 우리 회사에서 성장을 하거나 아니면 나중에 다른 계열사로 갈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제가 어떤 특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퇴근하고 나면 ‘이런 일 하려고 그렇게 공부해서 입사했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답답할 때도 많습니다. 동기부여도 잘 안되고요.”
“그렇죠. 이해합니다. 다만 제가 3개월이면 3개월 운영 업무를 하고 나면 기획자가 될 수 있다. 6개월이 지나면 당신의 기획안이 우리 회사의 새 사업으로 런칭될 것이다. 그런 얘기는 할 수가 없네요. 저도 기획자로 십 년 가까이 일을 했고 콘텐츠가 되었던 사업이 되었던 하나의 내 것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어렵고 고된 일인지 알기 때문에 나래씨한테 확답은 줄 수 없습니다. 답답하겠지만 좀 더 역량을 키워보죠. 제가 일부 업무는 다른 팀원들과 좀 나눠 맞고 새로 벌이는 사업에 투입될 수 있는 기회는 좀 만들어 보도록 할게요. 그런데 나래씨 다른 일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기획은 정말 모든 걸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도 기획자가 될 때까지 영업, 운영, 컨설팅 등 여러 일을 거쳐 왔어요. 나래씨처럼 기획직 채용으로 한 번에 기획팀에 합류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저와 같은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 몇 개월 되지 않은 직장생활에 너무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팀장님 의견을 이해하겠는데 그래도 전 답답하고 불안합니다. 첫 단추가 잘 끼워져야 제가 앞으로 기획자로 성장하는 데 문제가 없을 테니까요. 제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없다면 제가 우리 회사에 오랫동안 다닐 수 있을지도 사실은 제 자신에게 의문이고요.”
“나래씨 저랑 1차 면접 봤던 거 기억하죠? 요즘 입사하는 친구들한테 제가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인데 회사가 그리고 회사가 면접관으로 면접을 보게 한 제가 어떤 점을 보고 나래씨를 선발했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가능성, 잠재력 뭐 그런 거 아닐까요?”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요. 저도 우리 회사는 아니지만 L그룹 공채로 입사를 했고 입사를 하고 나서는 제 기준에 지금 나래씨가 하는 일보다도 더 허접한 일들을 많이 하게 되어서 ‘내가 이거 하려고 대학 나왔나?’라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 십 번씩 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기 싫은 날도 많았죠. 나래씨가 저한테 하는 이런 얘기도 저도 속으로는 생각했었습니다. 다만 팀장님이 물어보지도 알려고 하시지도 않았죠. 제가 답답하든 말든 그냥 저는 열심히 맡은 자리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하기 싫으면 사표를 내고 나가면 그만이었습니다. 면담은 하지만 그 면담은 그냥 정해진 내용의 면담이었지 제 의견을 들어주는 면담은 아니었습니다. 저도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은 안 하는데 요즘 드는 생각이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고 지내야 하는 시대로 바뀐 것 같네요. 그게 더 나은 거겠죠? 저한테도 나래씨한테도. 솔직히 얘기해 줘서 고마운데 제가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많지는 않네요. 업무를 점진적으로 조정하면서 나래씨 아이디어가 빛을 발할 기회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너무 답답해 하지 말고 업무에 집중해 주세요. 또 얘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저한테 면담요청 하시고요.”
나래씨와 이야기를 하면서 내 자신도 정리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래. 예전에도 나도 별반 다른 내용 없는 고민을 했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 하면 안 되지.’ 이런 얘기 할 수도 있지. 아니 하는 게 쌓아뒀다 사표를 내는 것보다 더 나은 건지도 모른다. 나한테도 나래씨한테도. 사람은 많아도 늘 면접을 보다 보면 마땅한 사람은 없고 ‘예전보다 영어 점수도 학점도 모든 것이 다 인플레이션이 됐는데 왜 나한테는 그만큼 좋은 자원으로 보여지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다. 면접관으로 지원자를 앞에 두고 있는 그 순간 순간에도. 막상 팀원을 뽑고 나서 같이 일을 해봐도 인색한 인정과 칭찬 문화에 불만을 가지는 사람이 많았고 그걸 만회하겠다고 조직의 리더들이 교육을 받고 입버릇처럼 하던 가식적인 인정과 칭찬은 오히려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극단적으로 내가 잘못된 건지 팀원들의 사고가 잘못된 건지 스스로를 자책해 보기도 하고 남의 탓을 해 보기도 했다. 결론은 둘 다 잘못된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직장생활 15년 동안 그 긴 시간을 우리 나라라는 울타리에서 어느 대기업에 있든 내 머리 속에 먹고 먹히는 사내 정치와 각박한 문화가 학습되어 있는데 그게 갑자기 다양성과 탄력성을 갖게 되어 새로 입사하는 밀레니얼 세대를 이해하고 그들을 포용하게 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배려는 서로 해야 배려이듯이 서로 잘 지내려면 함께 노력해야 한다. 팀장이 일방적으로 밀레니얼 세대를 연구하고 새로 들어오는 신입사원에게 맞춰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들의 성과와 관계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평적인 조직문화는 언제나 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역할과 책임을 충분히 하고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가 누군가에게 의존하게 되고 상하관계로 얽혀 버리면 수평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조직에도 아무리 진화된 조직이라 해도 수평과 수직은 공존할 수밖에 없다. 맡은 일에 따라 직무를 기준으로 한 완전한 직무급 제도가 실행되고 프로젝트 단위로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탄력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조직구조가 형성되지 않는 한 수평적 조직문화는 이상적인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상위직급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의 힘을 이양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밥그릇을 챙기기 위해 움켜쥐는 순간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문화는 아직 거기까지 가지 못했다. 그 변화의 속도도 더디게 진행되고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