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소기업의 경력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넘나들며 삶을 꾸려가다 보니 요즘 몸으로 느끼는 차이점 중 하나는 대기업에 있을 때는 사람 선발에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허접한 계열사에 있어도 그룹이면 지원자는 모인다. 예전에는 사람을 고르고 고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채용공고를 내는 일도 별로 유쾌하지 않다.
나도 속물인지라 생각해 보면 중소기업 생활이 대기업만큼 안 힘든 것도 아니고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적은 연봉에 시키는 일은 많고 자기 시간은 더 없다. 업무 대체자라고 할 것도 없는 경우도 많아서 맘대로 휴가 가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니 지원자들의 눈높이를 비난하거나 대우가 나쁠 수밖에 없는 현실을 탓하는 것은 그냥 술먹고 하는 얘기 정도 수준일 것이다.
한 10년 전에는 A에서 Z까지 작은 회사에서 다 배워서 내 사업을 차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회사는 작아도 여러 가지 일을 해 볼 수 있고 그 경험이 나중에 내가 사장이 되었을 때 자신이 된다는 개념이었다. 하지만 현재는 환경이 많이 바뀌었고 중소기업은 결국 보면 사장과 몇몇 특정인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구조가 되어 버렸다. 사원에서 대리가 대리에서 과장이 되어도 연봉은 100~200만원 차이나 날까 말까하고 회사는 커져도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별로 없다. 파격적인 승진도 거기에 걸맞는 연봉도 주어지지 않는 게 아주 지극히 평범한 현실이다. 어느 시기에는 중소기업에서 2~3년 경력을 쌓아서 대기업으로 점프하면 된다는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들도 유행했지만 전 세계 어디를 찾아봐도 우리나라만큼 고용시장이 양분화되어 있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2001년도에 군대를 제대하고 노동경제학 수업에 입문했을 때 노동연구원의 수석연구원이셨던 겸임 교수님은 이 양분화된 채용 및 경력개발 구조를 타파할 수 없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기 때문에 취직을 하려거든 대기업에 가야 나중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인력개발을 하면서 능력위주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는 국가직무능력표준 간담회 자리에서 능력주의 사회를 역설하시는 그 분을 다시 뵙게 되었다. 나는 그 분을 알지만 그 분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인사는 생략했다. 지금도 그 분과 스승과 제자로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래도 대기업에 취업하는 게 개인에게 나은 답이라고 이야기하실 것 같다. 물론 사견이다.
대기업에서 2년, 중견기업과 컨설팅 회사에서 9년을 보내고 다시 대기업에서 2년, 스타트업에서 1년을 보내고 다시 중소기업에서 몇 개월을 보내고 있는 지금 나는 진짜 순수한 내 중소기업에서의 경력이 직장인으로서 나의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대기업에서 배운 걸로 우려먹을 때도 있었고 컨설턴트 였다는 장점이 작용할 때도 있었지만 왜? 중소기업에 지원서를 내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내 자신을 돌아보면 정말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는 한 중소기업에 선뜻 지원서를 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특정 중소기업은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지원자와 회사 간의 보이지 않는 가이드라인이 있고 그게 상향보다는 하향 평준화 되어 있는 게 현실인 것 같다. 중소기업에서 사람을 선발하는 내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른 인사담당자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 않을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도전해 본다.
누구를 또 선발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몇 년 아니 몇 개월 못 있다 헤어지더라도 그 사람의 삶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방식이 맞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내가 늘 팀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나랑 같이 있었던 사람이 다른 회사로 가서 능력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내가 제일 싫어한다는 말이다. 다들 나를 떠나도 좋은데 어디 가서든 일은 잘해야 한다는 게 내 이야기이자 바램이다.
어려운 세상이다. 선발하는 자에게도 지원하는 자에게도. 그래도 또 사람을 뽑고 훈련시켜서 경험을 쌓게 해야겠지? 직장생활을 하는 한. 예전에는 팀장만 되면 이렇게 해야지라는 악한 비전들이 많았는데 정작 팀장이 되었을 때는 세월이 바뀌어서 착한 비전을 매일 세우면서도 팀원들까지 성장시켜야 하니 살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본 만화만 해도 수 천 편인데 만화로 그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홍대 미대다니는 선생님한테 과외까지 받고도 고등학교 3년 내내 미술 실기는 C였던 나의 현실을 볼 때는 그림 그리는 귀인을 만나지 못하는 한 만화는 그저 평생남는 도전과제가 될 것 같다. 이건 쓸데 없는 푸념이고. 여튼 늘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