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나의 연진에게 II
나는 꾸밈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부모님이 사주신 옷을 입었고 스마트폰에도, 이성교제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은 부모님이 피땀 흘려 버신 돈으로 산, 소중한 것들이었다.
그녀는 남의 물건 소중한 줄 모르고, 남의 마음 다치는 줄 모르는 멍청이었다. 신도 무심하시지- 하필 그녀와 같은 중학교에 배정되었다. 그녀에 대한 소문을 간간이 들었어도 사람을 겪어보지 않고 판단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나는 입학통지서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 기회로 이 친구와 친해질 수 있겠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를 '친구'로 생각했다.
교복을 입던 어느 해 봄. 하루는 그녀가 내 물건을 내가 입은 후드에 숨겨두고 "없어진 것 같으니 잘 찾아보라"며 중등부 예배당 의자 밑을 가리켰다.
그 말에 주변을 살피러 고개를 숙인 순간 잃어버린 줄 알았던 물건이 내 머리를 제법 세게 '탁' 치고 떨어졌다. 사람이 머리를 맞으면 이렇게 둔탁한 소리가 나고 아프다는 걸 처음 느꼈다. 내가 당황하자 그녀는 "장난이었다"며 다른 양아치와 함께 낄낄댔다.
그놈의 장난.
서로 즐기는 것이 아닌 한쪽이 다른 한쪽을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행위. "단 한 번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 없어요"라고 시인하는 행동. 그것이 그녀의 버릇이었다.
문제는, 과거의 내가 쓸데없이 여리고 순진해 빠져서 나만 참으면 언젠가 사람들이 나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당하고도 옅은 미소로 어물쩍 넘기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고, 이 짓이 몇 년씩이나 지속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듬해 아직 여름 숲 냄새가 가시지 않은 9월. 그녀가 일하는 곳인 줄 모르고 지하철역 근처 소품샵에 부모님과 들어갔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가게에서 나오고 싶었지만 '내가 왜 피해야 하나' 싶어 계속 쇼핑을 이어갔다.
전시된 소품 하나를 집어 들자 그녀는 사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함께 '너 같은 찐따도 이런 델 오는구나' 하고 나를 비웃는 눈빛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불편한 공기를 견디며 버티다 안 되겠다 싶어 가게에서 나가는 제스처를 취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대놓고 옆 직원과 쑥덕대기 시작했다. 부모님과 온 걸 뻔히 알면서도 그랬다는 건 나보다 내 부모님을 더 무시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소보다 비참했던 이유는 그녀와 그 무리의 부모님, 그리고 나의 부모님이 서로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이다. 내 일로 어른들끼리 사이가 틀어지는 것도 싫었고, 일이 커지는 건 더 끔찍했다. 내가 겪은 일을 하나하나 전하면 어른들 간의 갈등으로 번질 게 분명했기 때문에 모든 상황을 알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고 나의 성격까지 이용해 더욱 잔인하게 괴롭혔다.
이는 악의가 분명한 계산된 폭력이었다.
주일학교 고등부 학생이 되어서도 이런 상황은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느 겨울 전도축제가 있던 날, 그녀는 나를 흘깃 보더니 새로운 친구들에게 "얘랑 같이 있다간 찐따 취급 당한다"라며 말 한마디 주고받지도 못하게 했다. 나를 그렇게 취급하고 따돌리는 건 다름 아닌 그녀 본인인데 말이다.
그날 설교에서 목사는 '우리 모두 하나님 백성'이라며 신이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질 않나,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 하질 않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질 않나.
제 입으로 용서를 구하지 않은 사람의 죄를 대신 씻어준다는 말에 기가 차서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누가 뭐래도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때 목사가 성경의 본질을 설명해 주었으면 좋으련만, 그 구절의 참뜻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마음이 떠난 지 오래였다.
괴롭힘은 약 10년간 이어졌고, 교회 어른들은 모두 알고도 묵인했다. 신을 믿는다는 자들이 신이 가장 싫어하는 짓을 한 것이다. 고작 1년 동안 반을 떨어뜨려 놓거나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야지"처럼 같잖은 말을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