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인이 그랬다. 가난을 쓰려거든 가난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나는 정중한 말투에도 독촉을 받는 느낌이다. 말투야 어쨌든 결국 돈 내놓으라는 거 아닌가. 돈을 내주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사실 "돈 좀 주시겠습니까" 나 "돈 내놔 새끼야" 나 매 한 가지인걸.
한 번도 가난과 결별한 적 없는 나는 이미 가난에 익숙해져 있는데 이대로 헤어지지 않으면 꼼짝없이 결혼까지 할 것 같다. 그러나 가난은 나를 너무 사랑하고 나는 그와 헤어질 자신이 없다. 가난 없이 한 밤도 지내지 않은 나는 그 없는 밤을 상상조차 못 한다. 이렇게 가난에 익숙해진 나는 가난에서 나아가는 글을 쓰지 못한다. 가난에 안주한 내가 그와 헤어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글에서도 빈티를 풍기게 된다.
처음부터 나와 가난이 운명공동체였던 것은 아니다. 내가 철이 들던 어느 밤엔가 그는 새벽 도적처럼 자리를 비집고 내 옆에 누워있었다. 처음엔 조용히 잠만 청하는가 싶더니 점점 코를 세게 골고, 뒤척임이 심해진다. 이윽고 나는 새우처럼 온몸을 웅크린 채 잠을 청한다. 가난에 지지 않으려 몸부림도 쳐보고 귀를 막아도 보지만, 내 등만 터질 뿐이다. 가난은 고래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숨을 뱉는다. 나는 그의 숨에 깃든 군내를 맡으며 환각처럼 잠에 든다.
이놈은 나와 "웬수야"하며 평생 함께 산다 쳐도, 내 새끼는 이 새끼랑 살게 하지 말아야지. 있지도 않은 새끼 걱정을 하다가 문득 우리 엄마 생각이 났다. 가난의 대물림이 싫다던 우리 엄마는 나에게 무엇을 물려주셨나. 나의 가난이 엄마의 가난으로부터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가 데리고 살던 건 엄마의 가난이니까. 내 가난이 아니니까. 손가락을 접어가며 생각하다 가난의 대물림이 싫다던 우리 엄마가 나에게 물려준 것은 결국 가난을 물려주기 싫다는 말이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난을 물려주기 싫다는 우리 엄마는 가난을 물려주기 싫다는 말만 물려주었다. 나는 과연 내 새끼에게 무엇을 물려주게 될 것인가. 그 말조차 물려주지 못할까 그게 겁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