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딱지

by 채송화

# 무릎딱지 / 샤를로트 문드리크

엄마가 오늘 아침에 죽었다


엄마가 오늘 아침에 죽었다.

사실은 어젯밤이다.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밤새 자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달라진 건 없다.

나한테 엄마는 오늘 아침에 죽은 거다.








예닐곱 살의 어린 남자아이가 오늘 아침에 엄마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는 어젯밤에 죽었는데 나는 지난밤 일어난 일들을 알지 못한다. 어른들의 배려였을까.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알지 못한다. 마지막 슬픔을 알지 못한다. 엄마는 오래도록 아팠고 침대에 누워 나를 안아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고 이제 떠날 거라 미리 나에게 여러 번 말해두어서 나는 아침에 엄마가 죽은 소식이 충격보다는 그것이 어젯밤이라는 시간적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뿐이었다. 엄마의 죽음은 주체적이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수동적인 일이다.



엄마가 죽고 며칠간 아빠는 예견된 엄마의 죽음의 사실 앞에서 여전히 힘들어하셨다.

아침에 커피를 마시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잊은 슬픔이었다. 나는 나대로 슬픈 마음이지만 그 슬픔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는 나이다. 엄마의 부재가 주는 불편함만이 나의 슬픔의 표현방식이었다. 슬픔에 잠긴 아빠를 위로하는 것 또한 나의 슬픔의 방식이었다. 아빠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었기에 아빠를 위로하면서 나도 위로받았다. 어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슬픔을 가지는 방식은 자신의 몸과 마음까지 함께 슬퍼하며 일상생활이 달라지는 것이다. 여전히 하던 일들이 의미가 없어지고 의욕도 없어지고 남은 생의 시간이 더 이상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찾아야 한다. 어른들은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도 함께 생각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라는 명제는 우리의 일상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게 한다. 엄마의 죽음은 나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연결하는 나이는 아니지만 엄마의 죽음은 우리 가족의 행복과 관계된 것임은 분명히 안다. 죽음은 사실이고 일상도 사실이지만 슬픔은 사실인 척 우리 집을 잠식한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는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기에 나는 열심히 엄마의 흔적을 지키려고 애쓴다.

엄마의 냄새, 엄마의 목소리, 엄마가 해주는 아침밥상.... 엄마의 자리는 엄마의 흔적으로 남는다.

엄마를 열심히 지키려는 내 마음은 아빠의 슬픔으로 혼자 애쓰며 지켜낸다. 점점 지나가는 시간만큼 엄마의 사랑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다. 죽음이라는 것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행길이라는 걸 안다. 엄마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상실감은 그 자리에서 시간이 멈추듯 엄마 사랑을 잊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대체된다. 때로 슬픔을 극복하는 일은 주체적인 일이 된다.




엄마의 엄마가 우리 집에 왔다.

엄마의 죽음으로 슬퍼할 또 한 사람이 우리 집에 왔다. 어쩌면 엄마의 죽음은 외할머니에게 가장 슬플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나의 슬픔을 쉽게 드러낼 수 없다. 외할머니의 슬픔으로 인해 내가 더 많이 슬픔을 감추고 할머니를 아빠처럼 위로해야 할 것 같았지만 외할머니의 슬픔의 방식은 달랐다. 할머니는 내 방이 더 이상 엄마의 슬픔으로 가득 채워지지 않도록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내가 그토록 지키려던 엄마의 흔적이 추억이 아닌 슬픔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서 제 집을 찾지 못한 어린양 같은 아빠와 나는 외할머니에게 엄마를 지켜내는 방법을 알아간다. 엄마는 이 집에 더 이상 없지만 아빠와 내 마음에 계속 있을 것이란 것이다. 엄마의 몸체는 사라졌지만 엄마의 영혼을 어디에 둘 지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엄마의 흔적이 엄마가 아닌, 엄마를 기억하는 마음이 엄마가 그대로 우리와 함께 사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은 어린양이 울타리를 찾아 돌아오듯 안전한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엄마가 없는 우리 집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 슬픔으로 끝나지 않는다.

아빠는 나와 함께 일상을 살아간다. 일상의 조건은 변하지 않았으며 엄마의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바뀐 것은 엄마가 더 이상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죽음이 남겨진 자들의 슬픔의 몫이 아닌 죽음이 이른 자를 위로하며 또 다른 슬픔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때론 슬픔의 시간도 필요하다. 슬픔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방식이지 내 삶을 결정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죽음에 이른 사랑하는 이도 자신의 죽음 뒤에 슬픔이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엄마가 죽은 사실을 없앨 수 없고 슬픔을 없앨 수 없지만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며 엄마의 기억할 것인지는 아빠와 내 몫이다. 부족했던 지난날의 사랑을 후회하는 대신 남은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엄마의 자리를 채워갔으면 한다.




내 무릎에 딱지가 앉고 그 속에서 새 살이 돋아나고 있었다.

상처가 난 자리에는 딱지가 앉는다. 딱지를 계속 뜯으며 상처를 낫지 않게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슬픔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슬픔에는 딱지가 않고 그 속에서 다시 행복이 생긴다. 무릎에 딱지가 앉듯 엄마가 죽은 슬픔 위로 딱지가 안고 슬픔이 점점 지워져 간다. 갑작스러운 불행이 우리의 모든 것을 잠식해가지 않도록 그것이 모든 것의 결론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우리는 슬픔에 딱지를 앉혀야 한다. 상처와 슬픔이 치유되는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위로의 말, 누군가 사주는 맛있는 밥,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 등 누군가의 힘도 기대 볼만하다. 내 슬픔을 온전히 이해해주지 못한다 여겨지는 타인의 어설픈 위로도 딱지가 될 수 있다. 혼자만의 조용한 방식도 딱지가 될 수 있다. 언젠가 딱지가 없어지고 새 살로 채워진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또 다른 행복으로 채워진다. 딱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 듯 슬픔이 지나가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나에게도 아빠에게도 모두에게 필요한 시간이다. 때론 짧기도 때론 길기도 하지만 너무 긴 것은 행복의 시간을 줄여야 하는 것이다.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딱지가 떨어지고 나면 엄마의 죽음은 더 이상 슬픔이 아닌 것이다. 몸의 상처가 치유되듯 우리의 영혼도 슬픔에서 치유된다.




더 이상 죽음은 개인이 침묵해야 할 슬픔이 아닌 삶의 과정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상실감에 빠지는 사람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는 그림책이다. 온통 죽음과 고통을 상징하는 빨간 그림책은 우리의 삶에서 죽음은 한 부분이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슬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어린아이가 느끼는 엄마의 죽음과 아빠가 느끼는 아내의 죽음은 다르지 않다. 누구도 죽음 앞에서 공평하며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기에 우리는 죽음을 더 이상 침묵하지 않고 함께 바라보는 시선과 마음가짐의 연습이 필요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죽음을 애도하고 죽음 뒤에 삶을 함께 이야기하고 죽음의 의미를 새겨보는 것이다. 그 어떤 삶도 의미가 있듯 그 어떤 죽음도 의미가 있다. 우리 모두의 죽음이 삶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아름답게 해석되길 바란다.




함께 슬픔을 위로하는 사회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제 숨겨야 하는 개인적인 슬픔의 몫이 아닌 우리 사회가 함께 이 고통을 공감해 주며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가족끼리 상처가 회복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방황하는 가정도 많다. 행복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사회적 분위기는 이제 많이 정착되었지만 슬픔을 위로하는 공동체적 분위기는 아직 그리 많지 않다.

개인의 일이, 개인의 삶이 곧 사회가 되기에 우리는 주변의 죽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 마리 길고양이의 죽음과도 비슷한 독거노인들의 삶이 그러하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외롭게 죽어가는 이제 막 자립한 고아원 출신의 아이들이 그러하다. 혹시 개인적인 막다른 길목에서 죽음을 선택한 자들이 그러하다. 슬픔은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슬픔을 위로하며 슬픔이 우리의 모든 감정을 지배하도록 두지 않도록 건강한 슬픔의 무게를 견디도록 돕는 사회적 지원이 필요하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 죽음의 상처에서 치유되는 방식이 정신적 상실의 시대에 우리 사회에 요구되는 시대적 과제이다. 죽음의 범위를 개인적 범위에서 정의 내리지 않고 사회적 범위에서 경건 시하며 죽음의 이후에 개인이 겪을 트라우마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사회적 행복 공동체가 필요하다. 자발적인 위로의 공동체가 형성될 때 죽음의 슬픔을 건강하게 극복 가능하게 한다. 우리 사회에 외할머니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더 많은 어른이 필요하다.



더 이상 죽음은 개인이 침묵해야 할 슬픔이 아닌
삶의 과정이다. 그리고 슬픔을 함께 위로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생각할 질문>

- 내 죽음을 묵도할 수 있는 마지막 고통의 시간은 축복인가?

- 엄마의 죽음은 우리 삶에 무엇을 남겼는가?

- 죽음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진화할 수 있는가?

- 죽음 이면에서 행복을 찾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 죽음을 받아들이는 감정은 연습할 수 있는가?

- 죽음으로 인한 슬픔은 치유될 수 있는가?

- 죽음으로 가는 삶의 여정은 왜 슬픈가?

- 죽음과 우리 삶을 분리할 수 있는가?

- 어릴 적 부모의 죽음을 겪은 아이들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할까?

- 가치 있는 죽음은 어떤 죽음일까?

- 죽음은 마지막으로 전한 행복은 어떤 행복인가?

- 예견된 죽음과 갑작스러운 죽음의 차이는 무엇인가?

- 어릴 적 엄마의 부재가 아이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 어릴 적 부모의 부재로 자라나는 고아들을 위한 우리 사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 우리의 삶이 죽음에 이르는 전에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죽음의 슬픔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 가족의 죽음으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도울 것인가?





https://www.youtube.com/watch?v=rHmHNd7N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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