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걸을 수 없는 신발

by 채송화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신발



가만히 현관이 놓인 신발들이 내 선택을 기다리며

어디로 갈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스스로 정하지 않고 공상을 허사라 여기며

그저 가만히 놓여 있다


잠시의 상상도 없는 텅 빈 내 심장이

누군가의 심장을 대신해

함께 걸어가는 시간을 기다린다


하루 종일 나를 신고 다니는 신발의 주인에게

운명을 내맡기며 그저 함께 하는 길이

곧 내 길이 된다


그저 따라간 그 길 위에서

나의 하루를 만들고

나의 인연을 만들고

나의 삶을 만들어가며

그저 만들어지는 인생에서 후회를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걸을 수 없는 신발의 운명 앞에

주인에게 내맡긴 인생이 서럽다 푸념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의 꿈을 도우며 살아 가는 삶이,

본디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이라 여기기 때문이리라


걸으며 기억되는 삶

닳아서 없어지는 삶

낡아서 버려지는 삶


모든 삶이 의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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