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과 꼴찌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

교실에서 배우는 비교 우위의 경제학

by 서이안

몇 해 전 방영된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은 전교 1등과 전교 꼴찌의 달콤 살벌한 로맨스를 다뤘다. 이 드라마의 모티브가 된 실제 다큐멘터리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섞일 것 같지 않은, 그야말로 상극인 두 학생이 짝이 되어 생활하는 모습은 큰 화제가 되었다. 전혀 다른 성향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아름다운 드라마였다.


그렇다면 현실의 교실은 어떨까?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낸 15년 전만 해도 성적표에는 잔인하리만치 선명한 숫자가 찍혀 나왔다. 전교 석차 1등부터 450등까지. 한 학년에 400명이 넘던 그 시절, 내 이름 옆에 붙은 숫자는 곧 나의 존재 가치였다. 지금의 성적표에서 석차는 사라졌다. 과도한 경쟁을 막기 위한 교육적 조치다. 그러나 어른들이 종이 위에서 숫자를 지웠다고 해서 아이들의 인식 속에서까지 사라진 건 아니다. 아이들은 귀신같이 안다. 누가 공부라는 권력의 정점에 서 있고, 누가 그 사다리의 가장 아래 칸에 매달려 있는지.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열심히 공부해서 90점, 100점을 받아오는 아이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편이다. 우리 사회는 종종 “공부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야”라며 성적이 낮은 학생들을 위로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묵묵히 책상 앞을 지킨 상위권 학생들의 성실함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성적이라는 하나의 잣대가 아이들의 모든 능력을 재단하는 ‘절대우위’의 기준이 될 때 발생한다.


경제학 용어인 절대우위는 한 생산자가 다른 생산자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압도적으로 재화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우리는 종종 전교 1등이라면 공부뿐만 아니라 판단력도 더 좋고, 리더십도 뛰어나며, 심지어 인간관계까지 더 훌륭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안타깝게도 아이들 스스로도 그 기대에 갇혀버리곤 한다. 성적표의 숫자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면에서 자신이 옳다는, 일종의 절대우위의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교사인 나 역시 이 함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나는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지만, 가끔 동료들의 스마트폰 화면이나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소위 ‘인플루언서 교사’들을 마주할 때가 있다. SNS 속 화려한 '인플루언서 교사'들이나,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리는 동료들을 볼 때면 작아지는 기분을 느낀다. 교탁 앞에서 지식만 전달하는 내 모습이 문득 초라하게 느껴질 때, 나도 모르게 '절대우위'의 잣대를 나 자신에게 들이대고 있었다.


하지만 교과서와 시험지 밖으로 한 걸음만 걸어 나오면 절대우위의 신화는 무너지고 ‘비교우위’의 세계가 펼쳐진다.


경제학에서 비교우위란, 남보다 잘하는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상대적으로’ 더 나은 능력은 반드시 존재하며, 그것에 집중할 때 전체의 이익이 커진다는 원리다. 설령 1등이 공부도 잘하고 PPT도 잘 만든다 해도, 혼자 두 가지를 다 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1등은 자료 분석에 집중하고, PPT 디자인과 발표는 상대적으로 더 잘 해낼 수 있는 친구가 맡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이라는 논리다. 이 차가운 경제 법칙은 역설적이게도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는 가장 따뜻한 사실을 증명해 낸다.


이 비교우위가 절묘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장면은 체육대회 퍼레이드 연습 시간에 정점을 찍는다. 평소 수업 시간에는 무기력하던 채원이는 연습실 거울 앞에만 서면 타고난 춤꾼이 된다. 하지만 춤은 잘 춰도 아이들을 통솔해 대형을 맞추는 데는 서툴러 발을 동동 구른다.

이때 나서는 건 도현이다. 도현이는 상황 판단이 빠르고 리더십이 있다. 도현이가 채원이의 춤 동작을 분석해 아이들의 동선을 정리하고 효율적인 대형을 짠다. 반면, 우리 반 공부 1등 준우는 평소 조용하고 나서는 걸 즐기지 않는다. 대신 준우는 아이들이 춤출 공간을 만들기 위해 묵묵히 책상과 의자를 뒤로 밀고, 연습이 끝난 후 뒷정리를 도맡는다. 연습 때마다 딴청을 피우며 장난치려는 개구쟁이 우주에게 "야! 집중 안 해?"라며 호통을 쳐 기강을 잡는 건 평소 매사에 불만 투성이던 예린이다.


춤(채원), 기획(도현), 지원(준우), 규율(예린). 각자가 가진 재능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순간, 우리 반은 그 어떤 ‘1등’ 혼자서는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최고의 퍼레이드를 완성했다. 만약 공부 1등이 “내가 제일 똑똑하니까 안무도, 기획도 내가 다 할게”라고 절대우위를 고집했다면, 그 무대는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시대의 지성이라 불렸던 고 이어령 교수님은 생전 이런 말을 남겼다. “360명이 한 방향으로 뛰면 1등은 한 명뿐이지만, 각자 360도 다른 방향으로 뛰면 360명 모두가 1등이 된다.”


이 말이 교실에서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도 다른 교사들과의 무의미한 비교를 멈추고, 내가 가진 비교우위를 믿기로 했다. 화려한 기술은 없지만, 다정한 눈 맞춤과 인문학적 스토리텔링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여는 것, 그것이 교사로서 나의 비교우위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도 아이들의 360도 재능이 빛날 판을 깔아주려 노력한다. 문제 풀이 대신 경제 보드게임을 하거나, 모둠별로 사회 문제를 분석해 발표하게 하는 식이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평소 책상에 엎드려 있던 아이가 화려한 디자인 실력을 뽐내고, 말주변 없던 아이가 꼼꼼한 자료 조사관이 되어 팀을 이끈다. 교과서 밖으로 나오니 비로소 아이들의 숨겨진 비교우위가 발휘되는 것이다.


1등과 꼴찌가 손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사이좋게 지내자"는 도덕적 당위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지적이고 효율적인 생존 전략이기 때문이다. 비교우위는 우리를 꼴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킨다. 공부 1등 준우가 춤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교실에서 펜을 잡을 수 있는 건, 운동장에서 땀 흘리며 무대를 책임져준 채원이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채원이가 마음껏 춤출 수 있는 건, 도현이가 전략을 짜주고 준우가 묵묵히 환경을 정비해 주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의 짐을 나눠 짐으로써, 비로소 각자의 분야에서 당당한 1등이 된다.


경제학에서는 커피와 설탕, 삼겹살과 상추처럼 함께 소비할 때 그 효용이 커지는 관계를 보완재라고 부른다.


교실 안의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빈틈을 메우는 필수적인 보완재다. 준우가 묵묵히 깔아준 무대 위에서 채원이의 춤이 비로소 빛나듯, 나의 1등은 너의 활약 덕분이고, 너의 무대는 나의 지지 덕분이다. 성적표의 석차는 지워졌어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서열이 존재하는 세상이지만, 그 차가운 교실 어딘가에서 서로 다른 재능을 가진 아이들이 손을 맞잡는 순간, 비로소 교육은 다큐멘터리를 넘어 드라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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