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간의 편견을 비추는 거울
영국 런던에서 공부를 위해 잠시 머무른 적이 있다. 전 세계 내로라하는 도시들 중에서도 살인적인 물가로 악명을 떨치는 곳이 런던이었다. 가난한 학생 신분이었기에, 버스는 안 타고 걸었고 옷은 구세군회관에서 낡고 헤진 것들을 가져다 입었다. 그럼에도 어느 수준 이하로 아끼기 어려운 것은 하루하루 먹는 식비였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외식을 하는 것은 정말 어쩌다 한번 있는 일이었다. 런던에서는 한국처럼 식당에서 일상적인 끼니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대안으로 찾은 것은 인도나 아랍계 이민자들이 파는 Halal Food와 같은 것들이었다. 3~5 파운드면 싸구려 알루미늄 포일 접시에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린 치킨 비리야니나 카레를 사 먹을 수 있었다. 싼 가격치고 고기도 제법 들어있어 단백질 공급도 되고, 양도 넉넉한 편이었다. 5파운드의 가치를 넘는 매우 훌륭한 에너지원이었다.
헌데, 먹을 때는 포만감을 주는 푸짐한 양에도 불구하고 금세 배가 꺼져 쉬이 허기가 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쌀의 문제였다. 인도와 아랍인들이 내놓는 쌀 요리는 찰기가 없고 푸슬푸슬하며 길쭉한 장립종 쌀(Long Grain)로 만든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압력 솥밥으로 찰밥을 지어 먹이는 것을 낙으로 여기셨는데, 그때마다 하신 말씀이 "사람은 찰기가 있는 밥을 먹어야 배가 오랫동안 든든하고 힘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가만히 떠올리며 내가 먹고 있는 쌀을 보니, 이것이 허기의 이유였구나 답을 찾았다.
결국 며칠 후, 15파운드 정도 주고 전기밥솥을 샀다. 아무래도 직접 밥을 해 먹어야 돈도 아끼고 배도 덜 고플 것 같았다. 물론 내가 해 먹고자 하는 밥은 푸슬푸슬한 장립종이 아니라, 우리나라 쌀처럼 짧고 찰기 있는 단립종(Short Grain)이었다. 집 근처에 있는 아시아 식료품 가게에서 쌀을 찾았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일본 쌀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유학을 온 형이 밥을 해 먹고 싶을 때는 일본 쌀로 해 먹는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한국에서도 고시히까리가 맛있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고, 규동이나 초밥을 만드는 일본 쌀은 우리나라 쌀보다도 더욱 기름기가 좔좔 흐르고 쫀득쫀득한 맛이었던 것 같아 일본 쌀을 집어 들었다. 뒤늦게 그것이 포장만 일본어로 되어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재배된 단립종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거의 귀국 직전까지 그 일본 쌀을 곁들인 식사가 내 허기를 달래주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지금의 곡물 장사꾼이 되었다. 나는 밀과 옥수수를 주로 거래하기에 쌀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쌀을 담당하는 선배들의 샘플 정리를 도우면서 세상에 이렇게나 쌀의 품종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았다. 태국, 베트남, 미국, 중국, 인도, 미얀마 그리고 한국산 단, 중, 장립종이 다 있었으며, 이 중에는 찐 쌀(parboiled rice)이나 향미(香米)와 같은 특수한 쌀도 있었다.
어느 더운 여름 태국 출장을 가게 되었다. 쌀 때문에 간 것은 아니고 다른 문제가 있어 바이어를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는 어려운 출장이었다. 이럴 때는 통상 현지에 있는 제일 좋은 한식당에서 식사 한 끼를 사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여기서 잠깐. 태국은 베트남, 미국과 더불어 세계 쌀 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주요 쌀 생산국가이다. 바로 그 태국에서 정갈한 한정식을 먹다가 한국 음식에 대한 평이 나왔다. 지금이야 한류가 워낙 유행이라 한국 음식도 더불어 태국 사람들 사이에 인기가 있지만, 예전에는 태국 사람들에게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 명성을 자랑하는 태국 요리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이라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까지 쓰나 싶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다. 바로 "쌀"이 문제였던 것이다.
태국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단립종 쌀은 가난한 사람들 또는 밥을 자주 사 먹지 못하는 육체 노동자들이나 먹는 인식이 강하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배가 든든하다는 것은 소화가 잘 안된다는 것이고, 소화가 안된다는 것은 좋은 음식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고 한다. 특히 쌀이 넘쳐나는 태국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소화가 잘되는 장립종 쌀을 놔두고 배가 든든해야 하는 단립종 쌀을 먹는 사람들은, 그들의 눈에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친절한 설명에 감사를 표했다.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 미팅도 잘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최근 라오스를 여행하면서 이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라오스는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중국, 버마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내륙 국가이다. 산지가 많다고는 하지만 동남아의 젖줄인 메콩강이 지나고 있고 쌀을 재배하기에 기후도 적합하다. 그런데 라오스에서 밥을 주문하며 놀랜 것은, 라오스 사람들은 찰밥(sticky rice)을 즐겨 먹는다는 것이었다. 찰밥을 주문하면 깨끗하고 단정한 대나무통에 찰밥을 수북하게 담아 내오는데, 이것이 라오스 사람들의 주식이다. 심지어 쌀국수도 참쌀로 만드는지 그 쫄깃쫄깃한 질감이 베트남의 pho나 태국의 쌀국수랑 전혀 느낌이 다르다. 그렇다면 라오 사람들이 찹쌀밥을 즐겨먹는 것은 그들이 가난하고 먹을 게 없어서일까? 그런 라오인들을 주변 태국인들이나 베트남인들은 불쌍한 동정의 눈빛으로 바라볼까?
중앙집권화된 통일 국가로서 라오스는 14세기 중반 파웅움 왕에 의해 루앙프라방을 근거지로 하여 건국되었다. 이때 이미 루앙프라방과 비엔티안에서는 찰벼를 재배하는 벼농사가 주요 산업이었다. 적은 인구에 비해 메콩강 유역의 비옥한 땅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라오스 사람들이 먹을 게 부족하여 허기를 달래기 위해 일부러 찰벼 농사를 지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한편 건국 초기부터 라오스는 인근 베트남, 태국, 버마와 같은 강대국들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특히 태국과 베트남의 간섭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는데, 이 두나라는 라오스의 영토를 자주 침탈하였다. 그나마 베트남과는 20세기에 접어들어 사회주의 혁명 동지가 되고 영토문제도 정리되면서 관계가 매우 돈독해졌다. 하지만 메콩강을 끼고 마주 보는 태국과 라오스의 관계는 여전히 껄끄럽다. 심지어 라오스 주민의 상당수가 태국과 같은 타이족임에도 말이다. 이러한 태국의 탁신이 18세기에 라오스를 침략하여 많은 땅을 빼앗았으며, 라오인들을 코랏 고원에 강제로 이주시켜 관리하고 삼림지대를 개간하게 했다. 태국인들에게 코랏 고원에 이주시킨 라오스 인들은 가난하고, 더럽고, 약한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먹는 밥이 바로 단립종 찰벼, 찰밥이었다. 즉, 코랏 고원에 강제 이주시킨 라오스 인들에 대한 태국인들의 혐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자신들보다 약한 라오스와의 접촉에서 생긴 태국인들의 편견이 단립종 찰밥에 대한 그들의 거부감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아닌가 싶었다.
물론 어느 하나가 유일하고 확실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랜 시간과 다양한 이유를 거쳐 단립종 쌀을 주식으로 삼게 되었듯, 태국과 라오스 사이에서도 역사, 기후, 식생활 등 다양한 요인이 엉커 장립종과 단립종에 대한 현재 그들의 관념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재밌는 것은 이처럼 5파운드를 주고 사 먹을 수 있는 치킨 비리야니와 단정한 대나무통에 담겨있는 20,000낍짜리 찰밥을 먹으면서도 그 이면에 숨겨진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상상해볼 수 있다는 점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