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매일 곡물을 먹는다. 사람들이 고기를 얻는 대부분의 가축도 매일 곡물을 먹는다. 그리고 나는 그 곡물을 사고팔아 돈을 버는 곡물 트레이더다.
곡물 트레이더는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비교적 생소한 직업이다. 한국은 전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곡물 수입국이지만 최근까지 그 공급을 둘러싼 유통과정에는 깊이 관여된 바가 없었다. 막대한 해외 수입에 의존하는 구조를 문제라고 인식한 정부와 민간기업이 협력하여 산지 공급사슬(supply chain)에 진출하려는 시도가 과거에 있었으나 끝내 성공적으로 정착하지 못했고, 오늘날 세계 곡물시장에서 P사, H사, C사 등을 비롯한 우리나라 민간기업들의 빛나는 활약이 있으나 아직 성공을 판가름하기에 그 역사가 길지 못함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간의 축적된 노력으로 세계 곡물시장에서 한국의 저변이 이토록 확대되고 이해가 확장되는 것은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업계 종사자로서 반가운 일이다.
한편 세계 곡물시장의 움직임은 소위 ABCD라고 부르는 메이저 업체들에 의해 여전히 주도되고 있다. 모두 100년을 가뿐히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이들의 이름은 식량산업에 관심이 없는 일반인이라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하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 이름들은 베일에 가려진 어두운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 마치 전 세계의 식량을 움켜쥐고 기아문제나 환경파괴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리를 취하는 음험하고 악덕한 기업들로 말이다. 자유시장에서 기업들의 창의적이고 고통스러운 경쟁으로 그동안 인류의 식탁이 얼마나 값싸고 풍요로워졌는지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때로는 무지에 의해 때로는 의도적이거나 게으른 외면으로 이러한 왜곡된 이미지가 우리 가운데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ABCD를 향한 막연한 분노와 증오가 조장되는 현실과, 그 반대편에서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목소리의 부재에 나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사실 곡물을 포함한 더 넓은 범주의 원자재 트레이딩의 세계는 비교적 최근까지 오랫동안 조용히 수면 아래 가려져 있었다. 지구의 속살을 파헤쳐 얻는 석유, 석탄, 구리, 알루미늄, 철광석, 옥수수, 대두, 팜유 등을 세계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는 원자재 트레이더들은 일반 대중의 관심을 반기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보의 불균형에서 기회를 발견하는 트레이더들에게 대중의 관심은 썩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이는 소비자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고 대중의 인기를 마다하지 않는 엘론 머스크(Elon Musk)나 스티브 잡스(Steve Jobs)와 같은 오늘날 Tech업계의 거인들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점차 사회가 투명해지고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그동안 침묵을 지켜온 원자재 트레이더들은 강제로 수면 위에 끌려 나왔다. 그중 마크 리치(Marc Rich)는 가장 널리 세계인의 이목을 끈 트레이더의 대명사다. 세계가 오늘날처럼 가깝지 않고 냉전의 장벽이 견고했던 1960~80년대에 그는 소련, 이란, 남아공, 앙골라, 쿠바 등을 종횡무진하고 불법과 비(非) 불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King of Oil" (2009년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일대기의 제목이기도 하다)로 군림하였다. 세계 곳곳의 독재자, 군벌, 산유국의 토호 등과 친구였던 그는 중립국 스위스의 법망 아래 있으면서 2001년 클린턴 대통령에게 사면되기까지 탈세 혐의 등으로 미국 정부의 집요한 수배를 받았다. 이 영화 같은 이야기는 대중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히 자극적인 소재였다. 그가 세운 제국 Marc Rich +Co는 비록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Glencore와 Trafigura는 오늘날에도 세계에서 가장 큰 원자재 트레이딩 회사들이다. 그의 거대한 발자취에서 드러난 자극적이고 어두운 단면들이 원자재 트레이딩 업계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의혹, 불신, 혐오를 대중들의 뇌리에 단단히 각인시켰다. 그러나 창의적이고 열정적인 젊은 마크 리치가 1960년대까지 원유시장에서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기존 메이저(Seven Sisters)들의 독과점 체제에 도전하고 그들의 가격 통제력을 무너뜨려 자유시장에서 열린 경쟁이 이뤄지는 현대 트레이딩의 기틀을 놓은 사실은 잘 얘기되지 않는다. 아니 설령 이야기되어도 대중의 기억에는 잘 남지 않는다. 남미 어느 독재자와 결탁하여 금속을 사고팔아 막대한 돈을 번 일화나 아프리카 서안에 유독 폐기물을 내다 버려 사장이 감방살이를 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 복잡한 금융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고 원유시장에서 spot market이 탄생하였는가 보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기억하기 쉽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곡물 트레이딩 업계에 대해서도 비슷한, 아니 때로는 먹는 문제이기에 더 가혹한, 대중의 의혹과 불신이 넓고 깊게 퍼져있음을 본다. 수면 위로 끌려 나온 대어(大魚) 마크 리치에 사람들의 의심은 끝나지 않았다. 나아가 세계 곳곳 기아문제에 대한 중산층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문제의 배후에는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는 비인간적 식량 메이저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넘쳐나는 식량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굶어 죽는 사람들이 생기는 이유는 이들의 농간으로 식량이 불공정하게 분배되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마치 대단한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식량을 무기로 때로는 정치에 개입하여 한 국가를 뒤흔드는 힘마저 가졌다는 식량 메이저들에게는 두려움마저 느껴진다. 이러한 주장이 온전히 사실이라면 남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느낄법한 정당한 분노라고 나 또한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2022년 초, 지난 10년래 최고 수준으로 곡물 가격은 1년 넘게 강세를 유지하고 있다. 치솟은 가격이 이제 곧 일반 소비자들의 식탁에 전달되는 순간 온갖 자타칭 전문가들이 앞다투어 ABCD를 손가락질하며 사람들의 분노를 부추길 모습들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러나 분노의 대상은 정확해야 한다. 불의에 대한 분노는 정의로운 것이지만 분노의 대상이 정확하지 않다면 이는 실체 없는 허수아비와의 공허한 싸움에 불과하다. 나아가 허수아비 뒤에 교묘히 숨어있는 진정한 극복의 대상마저 놓치게 될 수 있다. 과연 ABCD 식량 메이저와 현재 세계 곡물무역의 구조에 대한 분노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일까?
앞으로 쓰는 이 글은 허수아비가 되어버린 어느 곡물 트레이더의 변명이다. 나는 ABCD 식량 메이저들과 그 속에서 일하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선량하고 인류의 행복에 기여하는 존재들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들의 윤리성, 합법성 또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인류와 지구에 미치는 영향을 판단하는 것은 나의 의도와 역량을 벗어난다. 나는 그저 한 사람의 트레이더로서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곡물 트레이더의 삶을 담담히 전달함으로써 세계 곡물시장을 바라보는 데에 많은 이들에게 낯설 수도 있는 관점을 하나 더 제공하고자 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하여 필자 본인은 잘못되었다고 믿는 그동안의 켜켜이 쌓인 오해와 미움이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다면, 또한 곡물 트레이더라는 흥미로운 직업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이 글의 필자로서 기쁠 것이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글은 연구 목적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본인은 학문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며 이 글이 학문적인 연구서가 되는 것 또한 바라지 않는다. 따라서 각종 통계와 수치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최대한 사용을 제한할 것이다. 또한 이 글은 필자가 몸담아왔던 또는 몸담고 있는 회사나 기관의 그 어떠한 공식적인 입장도 대변하지 않는다. 모든 내용은 나의 경험과 관찰에 기반하고 있으며, 나의 직접 경험과 관찰이 아닌 내용에 대한 서술은 빠짐없이 밝힐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이 글의 한계이자 가치가 될 수 있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