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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서정 Jan 15. 2022

곡물 트레이더란 무엇인가?

곡물 트레이더로 가는 길

“추석이란 무엇인가”,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우리 사회에 잔잔한 파장을 일으킨 서울대학교 김영민 교수는 정확한 단어의 사용을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단어의 기본적인 뜻뿐 아니라 관련된 함의까지 숙지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명료하고 심화된 의사소통을 기대해 볼 수 있다. 나는 이에 동의한다. 선생님께 한문을 배우던 대학생 시절부터, 자명해 보이는 단어조차 그 본질을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대상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음을 나 또한 경험적으로 느꼈다. 때로 이 질문은 번거롭고 짜증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껏 오랜 시간을 들인 대화가 불분명하고 피상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면 더욱 짜증나고 심지어 해로운 일이 아닐까? 식량안보, 스마트팜, K-농업 같은 단어들이 아무렇게나 느슨하게 사용될 때 나는 답답함에 빠졌다. 귀중한 시간을 들여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나와 같은 혼란에 빠지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먼저 “곡물 트레이더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명료함(clarity)은 곡물 트레이더의 덕목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곡물이 있다. 쌀, 옥수수, 밀, 보리는 일상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곡물이다. 오곡(五穀)밥에 들어가는 조, 기장, 수수, 콩 등도 비교적 친숙한 곡물이다. 요즘은 그냥 곡물이 아니라 슈퍼곡물까지 있다고 한다. 또한 세상에는 마찬가지로 여러 종류의 트레이더가 있다. 금융회사에는 주식, 채권, 외화 등을 사고파는 트레이더가 있다. 직장을 그만두고 주식, 비트코인 등의 매매에 전념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도 본인을 소개할 때 전업 트레이더라고 한다. 거품을 없앤 가격을 내세우는 이마트트레이더스도 있다.


일견 어렵지 않은 두 단어의 조합인 곡물 트레이더라는 단어를 나는 조금 좁게 정의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골 5일장에서 좁쌀을 파는 할머니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슈퍼곡물 퀴노아를 수입 유통하는 수완 좋은 사업가가 자신 또한 곡물 트레이더임을 자처했을 때 반박하기 난처하기 때문이다.


먼저 곡물(grain)이란 무엇인가? 곡물은 일반적으로 작고, 단단하며 건조한 알갱이로 사람이나 가축이 일정한 가공을 거쳐 먹을 수 있는 열량이 높은 식량자원이다. 과일이나 채소에 비해 수확 후 저장성이 좋아 오랫동안 저장하기도 쉽고 운송도 편리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문화권에서 가장 기본적인 식단을 구성하는 주식이 된다. 인류가 수렵채집 사회에서 벗어나 정착된 농경사회로 진입하는 데에는 곡물의 역할이 컸다. 전통시대에는 많은 사회에서 나라에 세금을 내는 수단이나 화폐의 대용으로 쓰이기도 했다. 넓게 보면 쌀, 옥수수, 밀, 보리, 콩, 수수, 조, 피, 기장, 귀리, 호밀 따위의 것들이 이러한 곡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곡류, 아곡류, 두류 등 더욱 세분화된 식물학적 기준은 나는 식물학자가 아니기에 건너뛴다.


내가 관심을 갖는 곡물은 식용, 사료용 그리고 공업용으로 전 세계적인 대규모의 산업적 소비와 무역이 이뤄지는 것들이다. 그중 식용유를 얻는 목적이 주가 되는 착유용 작물과 그 기름을 짜고 남은 부산물은 오일시드(oilseed)로 따로 구분한다. 대표적으로 대두, 유채, 대두박, 채종박 등이 여기에 속한다. 착유가 주된 목적이 아닌 병아리콩, 렌틸콩, 녹두 따위는 두류(pulse)로 구분한다. 그렇게 이들을 구분하였을 때 남는 작물들 중 대규모의 산업적 소비와 무역이 이뤄지는 옥수수, 밀, 쌀, 보리를 기본으로 조금 나아가 수수, 귀리, 호밀 정도까지를 곡물로 정의한다.


이러한 구분에 불만을 갖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옥수수에서 짠 기름 옥배유나 쌀에서 짠 미강유는 식용유가 아닌가? 두부나 두유를 만드는 수입용 대두는 기름을 짜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 않은가? 맞는 말이다. 다만 앞으로 내 이야기에서의 곡물은 과학적이거나 사전적인 정의가 아닌 업계의 트레이더들이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다소 편의적이고 좁은 구분임을 밝힘으로써 양해를 구한다.   


그렇다면 트레이더(trader)란 도대체 무엇인가? 간단하게 생각하면 유무형의 무언가를 사고팔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다. 그럼 우리가 일상에서 흔하게 마주치는 사고파는 행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을 트레이라고 불러야 할까? 동대문에서 옷을 파는 상인이나, 시장에서 배추를 파는 할머니나, 슈퍼마켓에서 과자를 파는 슈퍼 주인도 모두 어딘가에서 물건을 사 와 (직접 옷을 만들거나 배추를 재배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이를 팔아 돈을 버는 사람들 아닌가? 경제학적인 또는 사전적인 정의를 따르자면 이들 모두 시장에서 트레이딩을 하는 트레이더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겠으나 나는 앞으로의 글에서 이러한 정의를 받아들이는 데에 고민이 든다. 무언가를 사고팔아 돈을 번다는 본질은 같다는 점에는 동의가 되면서도, 나 자신을 포함하여 본인을 트레이더라고 소개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이와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점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실 이 질문의 대답이 고민되는 것은 트레이더라는 표현에 담긴 자부심, 우월감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특히 이러한 성향은 주변을 보았을 때 원자재 트레이더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난다.


앞으로 이 글에서 자주 등장하는 트레이더란 단어는 실물/현물 원자재를 사고팔면서 이를 실제로 세계 곳곳에 움직이고 그 흐름을 결정하며 참여하는 존재들로 정의한다. 따라서 월가의 책상에 앉아 선물 시장에 참여하여 열심히 옥수수나 원유 선물을 사고팔아 막대한 돈을 벌지만 실물의 흐름에는 관여하지 않는 존재들은 앞으로 트레이더의 정의에서 제외한다. 또한 자신이 소유/운영하는 광산, 유전 또는 농장에서 생산한 상품들을 세상에 내다 파는 행위도 좁은 의미의 트레이딩에서는 제외하기로 한다. 이미 생산된 또는 앞으로 생산될 실제 상품을 사고팔아 물리적으로 세상에 뿌리고 거두면서 이윤을 추구하는 존재들을 나는 트레이더로 정의하기로 한다. 이는 원자재 트레이딩의 세계를 깊이 있게 다룬 책 <<The World For Sale>>의 저자 Javier Blas와 Jack Farchy의 의견을 따른 것으로 의미 있는 구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현실에서는 이 또한 다소 경계가 애매하게 보일 수 있다. 유전을 가지고 원유를 생산하는 기업이 타 경쟁사의 생산물도 사고파는 트레이딩으로 진출하기도 하며, 반대로 트레이딩만을 하던 기업이 직접 광산을 소유하고 생산하는 방향으로 투자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원자재 트레이딩의 상징 Glencore다. 뿐만 아니라 옥수수를 한 번도 만져 보지조차 않은 헷지펀드의 원자재 담당이 우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트레이더가 되기도 하며, 트레이더들이 Citadel 같은 헷지펀드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이처럼 한 회사나 밸류체인 내에서도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가 다반 수지만 정리하면 1) 생산자가 아닌 시장 참여자로서, 2) 실제 현물을 사고팔아, 3) 세계 곳곳에서 그 움직임에 관여하고 결정하는 존재들을 나는 앞으로 트레이더라고 정의한다. 실무적으로 업계에서는 이를 cash trader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트레이더가 움직이는 현물에 초점을 맞춘 표현이다.            




결국 앞으로의 글에서 두 단어의 조합 “곡물 트레이더(grain trader)“란 식용, 사료용 그리고 공업용으로 전 세계적인 대규모의 산업적 소비와 무역이 이뤄지는 옥수수, 밀, 쌀, 보리 등의 실제 곡물을 생산자가 아닌 시장 참여자로서 사고팔아 세계 곳곳으로 움직이는 행위를 통해 이윤을 창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 나는 싱가포르에 앉아 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사이에서 옥수수를 이곳저곳으로 사고팔아 움직이는 곡물 트레이더 중에서도 옥수수 트레이더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트레이더는 여러 지역, 품목, 밸류체인 내의 단계에 따라 다양한 양상이 존재할 수 있다. 앞으로 나의 직접적인 경험에 비추어 설명하는 곡물 트레이더의 모습은 일차적으로 싱가포르 옥수수 트레이더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며, 그 과정에서 조명하게 되는 곡물 내에서도 타 품목 또는 해운과 같은 타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얻게 된 간접적인 경험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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