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배추흰나비

지금도 서진은 때때로 걸음을 멈춘다.

by 괜찮은사람

그녀를 보면 배추흰나비가 떠올랐다.

유난히 희고 보드라웠던 그녀의 살결 때문만은 아니었다. 웃고 있지 않아도 은은한 햇살 속에 있는 것 같았고 옆에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덕분인지 그녀의 마지막 모습도 창백함보다는 희게 느껴졌다.


모두가 그녀의 곁에서 목놓아 울 때도 서진은 조용히 몸을 떨 뿐이었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한바탕 눈물바다가 끝난 후 서진은 화단에 살짝 걸터앉았다. 처음도 아닌데 이 검정 옷은 이상하게 적응이 안 되네,라는 생각에 잠겨 저고리 깃을 보고 있는데 그 위로 흰색 나비가 점처럼 가만히 날아들었다. 잠깐을 앉아있던 나비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서진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녀의 작은 정원은 항상 풍성했고 나비와 벌들이 날아들었다. 도시 한복판이었지만 흙바닥을 자박자박 걸어서 도착한 '막 다른 골목'끝에 조용히 있던 집. 여기저기 치이고 마음이 아파도 이상하게 그 골목 끝 그녀의 집에 다다를 때면 마음이 편안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대추나무와 감나무는 계절마다 굵은 과실을 내어주었다. 2층 계단을 오르면 배추흰나비를 닮은 그녀와 실내 정원이 있었다. 고르고 골라서 예쁘게 가꾼 느낌과는 멀었다. 누군가 키우다가 어딘가 아프거나 시름한 화분들은 마법처럼 그녀의 집에서 무성하게 생명력을 찾곤 했다. 서진은 신기했다. 그녀가 식물을 돌보거나 약을 주거나 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 가끔 화분 물받이에 투박하게 흙 알갱이가 섞인 물을 주는 모습 정도였지만, 다시 볼 때마다 잎은 짙고 기름을 발라둔 것 마냥 반짝였다. 어느 날, 서진은 율마 잎이 병충해에 갈색으로 타들어가다 결국 죽어버렸을 때 그녀의 정원이 떠올랐다.


그녀는 요즘 말로 하면 'I'였다. 시끌벅적한 가족모임에서도 가만히, 조용히 누군가를 챙길 뿐 큰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서진은 그런 그녀의 조용함이 좋았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녀와 함께 앉아있을 때 서진은 누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편안함을 느꼈다. 주로 그녀의 집에 가서 서진은 그녀가 시간과 상관없이 차려주는 따뜻하고 소박한 밥상을 한 끼 뚝딱하고 그녀의 냄새가 나는 침대에서 1시간 남짓 낮잠을 잤다.


서진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교 1학년까지 그녀의 집 1층에서 살았다. 고등학생이던 시절, 서진에게 집적대는 옆 집 주차장의 남자가 있었다. 인사뿐만이 아니라 자꾸 집으로 향하는 서진에 말을 걸던 30대의 남자. '오늘은 마주치지 말았으면.'하고 땅바닥을 보고 걷다가 남자를 또 발견하고 몸이 굳었을 때. 어디선가 '왜 애한테 말을 걸고 그래요?' 하는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였다. 집에 있다가 허겁지겁 겉옷을 걸치고 슬리퍼 바람으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계단을 한 걸음에 뛰어내려온 것 같았다. 그 뒤로 그 남자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랬다, 그녀는 마냥 조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가 목소리를 낼 때는 그만큼의 중요함과 무게감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그녀의 팔에 매달려 집에 돌아가는 길은 참 든든했다.


서진은 그녀에게 가끔 옷을 선물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는 참 기뻐했다. 모든 절차를 끝내고 그녀의 집에 들러 장롱에 얌전히 걸려있던 양털 플리스도 그중에 하나였다. 서진은 한참을 그 옷을 껴안고 숨죽여 껴안았다. 그리운 냄새가 서진을 가만히 안아주는 것 같았다.


지금도 작고 따뜻한 아이보리 색을 띤

배추흰나비를 보면 서진은 때때로 걸음을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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