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HSP…?

벌레공포증이 있다면 이 글을 지나쳐주세요.

by 괜찮은사람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던가요.”


영상 속 전문가는 굉장히 특이하다는 놀라운 표정으로 말을 했고 나는 ‘그게 들리는 게 특이한 건가?’라는 의미로 짐짓 놀랐다.


할머니집은 한옥처럼 보이지만 안은 또 타일로 된 복도와 문으로 분리된 주방 공간이 있는 독특한 구조였다. 오래된 집이었기에 사람이 가득 모여서 생일초를 부는 순간 나는 손바닥만 한 물방개(… 바퀴벌레)를 보기도 했다. 가끔 할머니네 집에서 잘 때는 두껍고 폭닥한 이불을 깔고 머리를 미닫이 문쪽으로 하고 잤다. 어느 새벽이었다. 그날따라 잠이 안 왔는지 깼는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할머니를 깨웠다.


“할머니, 어디서 벌레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나.”

“아유, 무슨 소리야 이리 와 할머니랑 자자“


그렇게 다시 할머니한테서 안겨자는 엔딩이었으면 좋았으련만. 새벽녘에 나는 계속 할머니에게 몸이 가렵다고 했고 할머니의 야무진(!) 손길에 바퀴벌레는 내 옷 속에서 장렬히 전사해서 아닌 밤중에 나는 할머니에게 씻겨져야 했다. 놀라서 울기도 했지만 나의 1차 경고를 할머니가 믿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러웠던 것 같다.


그 뒤로도 ‘예민한 아이’인 나는 남들보다 많이, 빨리 느끼기에 불리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사람의 성향이나 기분을 잘 읽어서 상사에게 애정을 샀지만, 그 덕에 조금만 엇나가도 ‘일부러 엿 먹인다’라는 오해를 샀다.


사소하게는 옷의 라벨을 죄다 뗀다. 까끌거리는 케이블 니트를 입지 못한다. 후드티의 모자가 뒤로 당겨지면 계속 당겨 입는다. 한 번은 데이트 중에 옷이 너무 불편해서 길거리에서 전혀 안 울리는 트레이닝팬츠를 사서 갈아입고 다녔다. 다들 그런 줄 알았다.


엄마는 가끔 음식의 유통기한이나 상태에 무뎠는데, 한 두 번 그렇게 상한 음식을 먹고 속앓이를 하고 나니 ‘갓’ 맛이 가기 시작한 반찬을 귀신같이 알아내서 엄마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넌 참 애가 유별나, 어려서도 얼마나 울었는지 옆집 할머니가 애가 송곳에 찔린 줄 알고 집에 찾아온 적도 있다니깐.‘ 엄마의 ‘유별라이팅’에 브레인워시를 당하며 살다 보니 남들보다 잘 느낀다는 사실이 재앙이나 숨겨야 할 약점이라고 생각해 왔다. 실제로는 잘 다루면 꽤나 유용한 무기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송곳에 찔린 듯 울었던 그때도 뭔가 엄마의 서툰 육아가 있었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후각인데. 오늘도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가 옆을 스쳐가는 커플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숙박업소 향에 흠칫 놀라는 일도 있었다. 유독 집에서 나는 향이나 특유의 체취를 잘 캐치한다. 고등학교 때 할머니네 집에 더부살이를 할 때 근거리에 이모네 신축 아파트에 지주 놀러 가곤 했는데, 집 현관에서부터 거실까지 느껴지던 따뜻한(마치, 다우니 코튼향 같은) 향은 지금도 선명하다. 시답잖게 인터넷을 쓰겠다는 핑계로 이모네 집을 들락였는데, 궁극의 이유는 따뜻한 향이었다. 이모와 이모부의 동화같이 모범적인 따뜻함이 킥이었겠지만.


얼마 전에 지방 소도시 여행을 다녀왔다. 그 지방에 가면 웬만하면 버스로 이동하는 걸 좋아하는데, 어떤 버스에 올라탔을 때 예전에 할머니 품에서 나던 그리운 향이 느껴졌다. 따뜻한 햇살이 창가로 스미는 버스 안에는 단정하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었다. 그냥 그 순간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중언부언 썼지만. HSP더라도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그 감각과 친하게 지내거나, 지휘하거나, 아님 잠식당하거나. 뭐든 ‘컨’이 중요한 거지.


*아, 한 가지 더. 피아노학원 다닐 때 피아노 실력은 그저 그랬지만 청음 시간엔 절대음감이었다. 이런 거 보면 재능이 꼭 실력으로 이어지진 않는다는 게 확실하다.(그렇다. 나는 게을렀고 지금 악보도 읽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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