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동네 카페에서 일하다가, 나도 모르게 옆 테이블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울 때가 있다. 한가해서 귀를 기울인 건 아니다. 코스피, 코스닥에 속한 2000여 개 종목의 등락을 온종일 살피는 ‘시황 당번’을 하던 때였다.
정말 바빴다. 오전 9시, 장이 열리자마자 수많은 종목이 와장창 깨졌다. 이역만리 미국 중앙은행 수장인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예상보다 금리 더 올릴 테니, 당신네들 단단히 각오해”라고 한 덕분이었다. 이런 날은 장이 열리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30분 장 마감, 이후 시간 외 거래까지 온종일 정신이 없다. 급락하는 종목들 속보 쓰랴, 시황 분석하랴 손이 스무 개라도 부족하다.
그러나 ‘반짝이, 유행, 촌스러워’라는 단어 조합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귓가로 날아와 딱 꽂혔다. ‘대체 뭐길래’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대놓고 쳐다보기는 민망하니, 테이블 위에 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면서 곁눈질로 옆 테이블을 흘긋 봤다.
고개를 든 순간, 보고야 말았다.
‘풉’
입에 머금은 아아를 뿜을 뻔했다. 입술을 꾹 닫은 덕에 참사는 피할 수 있었다.
옆 테이블에는 일흔은 족히 돼 보이는 할아버지 두 분이 앉아 계셨다. 내 대각선 편에 앉은 할아버지의 가슴팍에서는 번쩍번쩍 빛이 났다. 아이언맨의 아크 원자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밝게 빛났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살펴봤다. ‘반짝이, 유행, 촌스러워’의 정체는 우리네 할아버지들이 결혼식장에 가면 흔히 매는 바로 그 넥타이였다.
일흔 넘은 할아버지들끼리 유행이 지났다며, 요즘은 광택이 안나는 단색 넥타이가 유행이라는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백발 할아버지라고 세련돼 보였던 건 아니었다. 상의는 회색 재킷, 하의는 등산복 바지였는데, 북한 인민복이 떠올랐다.
나이 든 분들은 유행 따위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편견이 깨지는 유쾌한 순간이었다. 한편으로는 일흔이 넘어서도 유행을 따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됐다.
이후 하루 온종일 ‘유행을 따른다는 게 대체 뭘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우리는 왜 유행을 따를까? 남들에게 ‘후져 보이지 않기 위해’ 서가 아닐까. 그러나 나이가 들면 자연히 감은 떨어진다. 젊은 감각을 유지하기 어렵다. 부단히 애써도 결국 후져 보일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렇다면 굳이 유행을 따를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패션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파리에는 유행이란 게 없다.
그럼 무엇이 있느냐고? 유행 대신 멋이 있다. 멋이 무엇이냐고? 독창적인 스타일을 선보이는 것이다. 독창성은 어디서 나오느냐고? 바로 나를 가장 나답게 표현할 때다. 이런 사람들은 당당하고 스스로 광채가 난다. 흔히 ‘아우라’가 뿜어져 나온다고 한다.
파리에 있던 때 아직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 장면은 사람들의 얼굴과 체형만큼이나 다채로웠던 파리지엥의 패션 스타일이었다. ‘모나미룩’, ‘**페이스 패딩’ 등 매 시기마다 유행하는 아이템이 있고, 어디를 가나, 누구나 유행템 하나쯤은 걸치고 다니는 우리와는 정반대였다. 파리지엥은 남들과 다른 옷을 입고 있다고 위축되지 않았다.
10년 전에 산 것 같은 재킷을 걸치고 있더라도, 파리지엥들은 자신만의 패션 철학을 당당히 내보이며 무대 위를 런웨이 하듯 일상을 살아갔다. 우리나라였다면 진즉에 촌스럽다고 의류 재활 용품함에 버려질 아이템들을 그들은 자기 방식대로 믹스 앤 매치해 입고 다녔다.
유행은 남들처럼 멋있어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다. 유행을 좇는 이는 끝없이 앞선 사람, 주변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야 한다. 유행을 좇는 삶은, 곧 늘 가슴 졸이고 사는 삶이다. 언제 유행의 대열에서 멀어질까, 혹여나 ‘후져 보이게’ 되지는 않을까라고 말이다.
그러나 후져 보이는 건 앞서 얘기했듯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감각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후져 보이는 건 필연이다.
대안은 멋을 추구하는 것이다. 진짜 멋을 추구하려면 남들이 뭘 입고 어떻게 사는지 살필 시간에 나만의 철학, 패션, 삶의 태도를 확립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한 가지 질문.
반짝이 넥타이를 맨 반짝이는 머리의 할아버지와 백발의 북한 인민복 할아버지가 의견의 일치를 본 때가 있다. 바로, "죽는 건 남자가 먼저 죽어야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