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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갸비 Nov 12. 2022

동대문에는 타임머신이 있다

광희동 골목과 필름카메라와 필름 파는 자판기

“세상에”


필름 카메라로 찍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 줄 알았다. 양팔을 벌리면 끝이 맞닿는 골목, 어른 몸통 만한 종이 묶음이 제본 기계의 ‘쓱싹쓱싹’ 소리 몇 번에 잡지며 포스터로 변하는 인쇄소, 대부분 1층 높아야 2층에 불과한 난쟁이 건물들까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6, 7번 출구 부근, 광희동 일대를 걷다 보니 1970~80년대 서울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했다. 광화문과 여의도, 낙성대를 주 활동 무대로 삼는 내게 서울 구도심 풍경은 봐도, 봐도 낯설고 또 신선했다. 저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해서 이 동네를 찾은 건 아니었다. 만나기로 한 대학 동기가 하도 바쁘다길래, 어디서 일하느냐고 물었더니 CJ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한다고 해서 발걸음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친구에게 ‘바쁜데, 뭐 거기까지 오라고 하냐’며 타박했다.


그러나 동네를 한 바퀴 둘러보고는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매력적인 공간을 알게 해 주다니 고맙다 짜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멀리서 찾아온 오랜 벗에게 친구는 맛집을 알려주겠노라고 했다. 오장동 함흥냉면거리로 발길을 옮겼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했던가. 오장동 함흥냉면집들은 공교롭게도 11월 초중순 인테리어 공사에 가게 문을 걸어 잠갔다.


가을, 겨울 냉면 비수기를 틈타 내년 여름 장사를 준비하느라 바빠 보였다. 아쉬운 대로 근처에서 갈비탕 한 그릇을 뚝딱했다.


미안한지 친구는 본인은 잘 모르겠는데,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좋다 하는 커피집이 있다며 길을 안내했다. 성인 남자 둘이 걸으면 꽉 차는 꼬불꼬불한 골목과 기껏해야 1층, 2층인 건물들을 지나쳤다. 대체 어디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노란색 자판기를 보고 난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이게 뭐야”



골목길 어귀,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 앞에 샛노란 ‘필름카메라와 필름 자판기’가 떡 하니 서 있었다. 2022년 11월, 내 눈앞에 등장한 과거의 유물 앞에 잠시 당황했다. 필름은 1990년대를 마지막으로 2000년대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 이후 스마트폰 카메라의 비약적 발전으로 역사의 유물이 된 지 오래였다.


박물관에서나 볼 줄 알았던 필름카메라와 필름을 심지어 이것들을 파는 자판기는 암만 봐도 비현실적이었다. 실제가 맞는지, 꿈은 아닌지 일부러 세게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떠도 자판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현실이었다. 아, 놀라워라.


놀라움은 이내 반가움으로 바뀌었다. 여태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꿋꿋이 제 자리를 지켜줘서 고마웠다. 필름카메라가 사라진 시대를 사는 우리, 필카가 그리우면 스마트폰 어플로 만들어낸 '필카 감성' 모드를 쓰는 게 최선이었다.


진짜인 필카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필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줄 건 가짜인 어플뿐이었다. 폭풍우에 휩쓸려 사라진 줄 알았던 어부 남편이, 돌아올 때의 반가움이 이런 것일까 싶었다.



필름카메라와 필름을 파는 자판기, 이걸 보고 반갑고 고마워하는 나를 보니 여러 생각이 오갔다. 가령, 과거를 버리고 새롭게 바뀌는 것 만이 전부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 같은 것 말이다. 때로는 우직하게 한 자리에 서서 바뀌지 않고 본래 모습을 지킬 필요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독하게 과거와 전통을 지키는 유럽이 일견 이해가 됐다. 우리나라였으면 진즉 재개발·재건축을 해 과거의 흔적은 남기지 않았을 테지만, 파리나 로마는 수백 년 전 도심 모습을 여태 지키고 있다.


이런 때면 스스로 작은 다짐을 하나 해본다. 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내 모습 중 하나는 결코 바꾸지 않고 우직하게 남겨둘 테다,라고 말이다. 그리고 바꾸지 않는 모습은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해 본다.


가령,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때 환하게 번지는 웃음과 진심으로 반기는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이들에게 필카와 필름 같은 반가움을 줄 수 있기를, 이 반가움이 한 장의 사진처럼 우리 기억 속에 남아 떠올릴 때마다 미소 지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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